[과학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 및 불국사·석굴암(32)
[과학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 및 불국사·석굴암(32)
  • 이종호<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 승인 2014.08.16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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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지구(동남산(2))

동남산의 서쪽을 답사한 후 되돌아 나와 통일전의 동쪽을 향하는데 중앙에 위치한 통일전을 들어가 본다. 통일전은 삼국통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건물로 무열왕, 문무왕의 영정은 김기창 화백, 김유신 장군의 영정은 장우성 화백이 그렸다.

세 사람의 사적비와 삼국통일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삼국통일의 역사를 그림으로 표현한 기록화 17점이 줄지어 전시되어 있는데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는 내용들도 많으므로 시간을 쪼개어 볼 만하다.

통일전에서 몇 걸음 걸으면 화랑대교육원이 나오는데 이곳에 경주남산동석조감실(지방문화재자료 제6호)가 있다. 이 감실의 크기는 높이 2.5미터, 내부공간의 바닥 길이 1미터, 높이 1.4미터, 깊이 0.9미터이다. 남향으로 다듬지 않은 장대석으로 지대석을 삼고 그 위에는 방형판석 4매를 결구하여 불상을 안치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판석의 내면은 다듬고 외면은 다듬지 않은 것을 사용했으며 입구 바닥에는 연화문 대석을 놓았다. 어떤 성격의 불상을 모신 곳인지 확실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좌불을 안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석조감실을 보고 나와 우측으로 발길을 돌리면 곧바로 정강왕릉(사적 제186호)과 헌강왕릉(사적 제187호)을 만난다. 신라 49대 헌강왕은 875년부터 886년까지 11년간 왕위에 있었다. 헌강왕 시절은 태평성대였고 남다른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당대에 경주는 성 안에 초가집이 한 채도 없는 기와집이었고 사람들은 밥을 할 때 장작 대신 숯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의 신라가 매우 쾌적하고 윤택한 생활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봉분 높이 4미터, 지름 15.8미터로 정강왕과 같이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이며 봉분 하부에 4단의 둘레석을 돌렸다. 내부 구조는 도굴되었는데 연도가 석실의 동쪽 벽에 치우쳐 있으며 석실의 크기는 남북 2.9미터, 동서 2.7미터다. 벽면은 비교적 큰 돌을 이용하여 상부로 갈수로 안쪽으로 기울게 모서리를 죽이는 방식으로 쌓았다.

석실 입구에 석문, 문지방, 폐쇄석, 묘도를 갖추고 있으며 연도의 크기는 길이 142센티미터, 너비 96〜128센티미터다. 석실 내에는 서벽에 접해서 2매의 판석으로 된 시상석이 있다.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으로 인해 이 능을 헌강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신라 최전성기의 왕릉치고는 다소 작다는 감이 있다.

정강왕이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기에는 너무 일찍 죽었기 때문인지 그의 능도 헌강왕처럼 규모가 작다. 봉분의 높이 4미터, 지름 15미터로 둥글게 흙을 쌓은 봉토분이다. 봉분 하단에는 둘레석을 돌렸는데 최하단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장방형 할석(割石)을 2단으로 쌓았다. 바로 앞에는 1매의 판석으로 된 상석이 있고 그 앞에 다듬은 장방형 화강석으로 축조한 석단이 있다.

신라 50대 왕인 정강왕은 헌강왕의 동생으로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년 만에 병으로 사망했으므로 졸지에 왕위에 오른 사람이 바로 그의 동생인 진성여왕이다. 진성여왕은 여러 가지로 흥미있는 인물이다. 재위 초기에는 민심 수습에 최선을 다했는데 자신의 남편인 각간 위홍이 죽자 별안간 돌변해 궁실로 미소년들을 불러들여 궁궐을 소위 난행 즉 섹스 파티장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이들 미소년들이 요직을 받는 등 신라 공권체계가 무너지면서 뇌물이 성행하고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를 낳았다. 진성여왕이 납세를 독려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민심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런 것들이 계기가 되어 궁예와 견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진덕여왕이 즉위 12년(897)에 반성하고 왕의 자리에 물러났지만 이미 시간의 추는 새로운 세대로 향하고 있었다.

두 형제 릉을 지나쳐 미륵골 보리사로 향한다. 남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찰인 보리사에는 남산에서 가장 완벽한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미륵곡석불좌상(보물 제136호), 보리사마애석불(지방유형문화재 제193호)이 있다.

미륵곡석불좌상은 보리사의 대웅전 옆에 있다. 보리사 석불좌상은 높이 2.44m, 전체 높이 4.36m에 이르는 대작이다. 안내판에는 ‘경주 남산에 있는 석불 가운데 가장 완전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적혀 있는데 경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상으로 꼽힌다. 함께 동행한 김천일 사장은 불교유적에 관심이 별로 없는 사람들도 이 불상을 보면 감탄사를 절로 토해낼 것이라고 말한다.

연꽃팔각대좌 위에 앉아 있는 석가여래 좌상은 큼직한 육계가 표현된 곱슬의 나발 머리에 장방형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양감이 풍부한 편은 아니지만 반듯한 이마, 가늘고 긴 눈썹과 귀, 오똑한 코, 반쯤 감은 눈으로 이 세상을 자비로운 표정으로 세상을 굽어보고 있다고 평한다. 얼굴은 신체와 다른 돌로 이루어졌고 목에는 삼도를 뚜렷이 나타내었고 좁아진 어깨에 가슴은 건장한 편으로 서방정토의 아미타여래로 추정하지만 석가여래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높이 2.7미터, 폭 1.9미터인 광배는 별도로 마련된 돌을 댄 것으로 연꽃의 바탕 사이사이에 7좌(座)의 작은 와불, 그 옆에 불꽃 무늬를 새겼다. 오른손은 무릎위에 올려 손끝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대고 있다. 작은 화불은 있는데 부처의 빛이 비치는 곳마다 그곳에 부처가 있다는 뜻이다.

배광 가장자리에 돌아가며 불길을 새긴 것은 부처의 위력을 나타낸다. 특히 배 모양의 광배 뒷면에는 모든 질병을 구제한다는 약사여래 좌상이 선각되어 있는데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다. 앞뒤로 불상이 새겨진 희귀한 예이다. 높이 1.35미터의 연화대좌는 겹으로 쌓은 목련의 밑받침에 팔각의 간석을 세우고 앙련을 조각했다. 팔각의 중대에는 각 모서리에 기둥 형태가 조각되어 있다.

미륵곡석불좌상을 본 후 내려오면서 보리사 입구에 ‘보리사마애석불’이 있다. 앞으로 약간 기운 바위 면에 광배 형태로 가운데 부분을 약간 안으로 파서 1.5m가량 되는 얕은 감실을 만든 다음, 그 안에 90cm 정도의 부처를 양각으로 새겼다.

머리에는 나선형 머리카락이 표현되고 얼굴은 두툼하고 세밀하게 조각하여 자비 넘치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다. 귀는 길게 표현하고 목에는 3개의 선으로 나타내는 삼도를 두 선으로 표현했다. 옷은 양 어깨를 덮고 있으며 가슴을 일부 드러내고 속옷의 윗단만 경사지게 나타내었다.

양손은 옷 속으로 숨겨서 표현하지 않았고 발이 표현되지 않은 양 다리는 특이하게 가운데로 향하는 옷선 몇 개로 처리했다. 아래쪽에 흐릿하게 표현된 연꽃대좌는 앞 바위의 뒷면에 가리어 생략되었다. 이 마애불은 보리사 석불좌상보다 약간 후대의 작품으로 추정하는데 신라 하대의 작품이지만 기울어지지 않은 신라인들의 문화적인 힘을 느끼게 한다.

마애석불이 남산에서도 유명한 것은 탁월한 위치 때문이다. 이곳에서 도리천이라 불리는 낭산, 선덕여왕릉, 사천왕사터, 망덕사터는 물론 멀리 황룡사터까지 한 눈에 다 보이므로 약 50미터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하는 고통 정도는 곧바로 사라질 것이다.

다음 행선지는 탑골이다. 남천 옆의 대웅전을 갖춘 소박한 옥룡암(불무사)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높이 10m, 둘레 30m의 커다란 부처바위에 ‘탑골마애조상군(보물 제201호)’이 나타난다.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에 신인사라는 사찰이 있었던 곳으로 남쪽에 3층 석탑이 있어 ‘탑곡(塔谷)’이라 부른다.

거대한 바위에 만다라적(曼陀羅的)인 회화처럼 묘사한 34개의 마애석불들로, 신인종(神印宗) 계통의 사찰에 딸린 것으로 추측된다. 남쪽은 다른 3면보다 훨씬 높은 대지(臺地)이며, 목조건물의 터와 탑 및 석등의 유품들이 남아 있어, 남면 불상을 주존(主尊)으로 하는 사찰로 추정한다. 우선 남면부터 설명한다.

남면은 높은 지대 위에 있기 때문에 바위 윗부분만 지상에서 2.7미터 높이로 솟아 있다. 바위 전체의 너비는 7.66미터이지만 중앙이 나누어져 두 개의 암벽을 이루고 있다. 중앙 본존상은 큰 연꽃 위에 앉아 있는데 복잡하게 주름진 상현좌(裳懸座)로 연꽃 대좌의 윗부분을 덮고 있다.

몸체는 단정하고 두 무릎은 넓게 놓여 있어 한없이 편안하게 보이는데 7세기경에 나타나는 불상들의 옷차림이다. 우측 협시보살은 연꽃 위에 단정히 앉아 두 손을 합장하고 머리를 약간 본존여래 쪽으로 돌리고 있는데 그 때문에 두광이 둥글지 않고 타원형으로 나타난다. 왼쪽 보살도 우측 보살과 같은 모습이나 몸 전체가 본존불을 향해 기울어져 있다.

부처바위 동쪽은 이곳에서 가장 넓은 암면인데 높은 쪽은 높이 10여미터, 낮은 쪽은 높이 2.5미터로 전체적인 면은 큰 삼각형이다. 암벽 중앙에는 극락세계의 아미타여래 삼존이 새겨져 있으며 본존여래의 왼쪽의 협시보살은 관세음보살이다. 여래상보다 작은 몸체로 작은 연꽃에 앉아 있는데 머리에는 보관을 썼고 두 어깨에는 천의로 덮었다.

우측에 대세지보살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풍화로 인해 모두 사라졌다. 삼존불 머리 위에 극락을 찬미하는 여섯 명의 천녀들이 새겨져 있다. 꽃잎을 날리며 혹은 쟁반을 들고 혹은 합장을 하고 날라오는 모습이다.

이 조각들은 얇은 돋을새김이라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데 일반적으로 백제 조각가 또는 백제에서 공부한 조각가가 새긴 것으로 인식한다. 기둥바위의 남면에는 금강역사가 새겨져 있는데 금강저를 든 모습으로 보아 연대가 매우 오래된 인왕상이다.

서쪽 면은 네 면 중에서 제일 좁은 편인데 능수버들과 대나무 사이에 여래조상이 새겨져 있다. 사각에 가까운 갸름한 머리에 자그마한 육계가 솟아 있고 귀는 어깨까지 드리워져 단정하다. 정면을 바라보는 가는 눈, 코, 꼭 다문 입 등은 이 바위에 새겨져 있는 어느 불상보다 근엄한 표정이다.

머리에 비해 조금 갸름해 보이는 몸체는 반듯한 자세이고 두 무릎은 연꽃 위에 평행으로 놓여 있어 한없는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두 손은 옷자락에 가려 보이지 않으며 머리 뒤에는 연꽃을 새기고 구슬을 늘어뜨린 화려한 보주형 두광이 배치되어 있고 화염이 새겨져 있다. 이 바위 면은 서쪽을 향하고 있으나 부처는 동방유리광세계의 약사여래로 추정한다.

거대한 바위에 불상·비천상·승려상·보살상·인왕상·나무 등을 회화적으로 배치한 만다라적인 구조는 그 유래를 볼 수 없는 화려한 조상군이며 특수한 석굴사원의 한 예로 인식하며 7세기 무렵의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부처바위가 남다른 중요성을 부여받고 있는 것은 북쪽 면에 한국 학자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작품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선덕여왕이 세운 황룡사 9층 목탑의 원형으로 보이는 탑과 7층의 목탑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시대부터 금당 앞에 2개의 탑을 세우는 쌍탑이 주류를 이루는데 이 탑들도 쌍탑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두 기의 탑은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가 완전히 갖추어져 있다. 동쪽의 9층탑은 2중 기단 위에 세워져 있는데 1층은 비교적 높고 다음 층부터는 낮다. 추녀의 폭과 각층의 높이는 올라갈수록 축소되어 3.7미터 높이에서 9층 지분이 삼각으로 끝을 맺는다. 추녀 끔마다 풍경이 달려 있고 탑꼭대기에는 상륜부가 있다.

특히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 앙화 위에 많은 풍경이 달린 보륜이 다섯 겹으로 되어 찰주에 꽂혀 있고 그 위에 수연, 용차, 보주에 이르는 부분이 모두 나타나 있어 몽골군의 침입 때 불타 사라진 황룡사의 9층목탑의 원형으로 추정한다.

서쪽 탑은 동탑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자리 잡았는데 동탑과의 간격은 1.53미터이다. 역시 2중 기단 위에 7층으로 솟았으며 그 모양은 동탑과 같은 형식이다. 이들 두 탑 중앙에 석가여래가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여래상의 손은 옷자락에 감추어져 있다. 머리 위로 천개가 떠 있는데 이 천개는 인도처럼 더운 나라에서는 빛을 가리기 위한 양산처럼 사용되는 것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높은 사람의 신분을 돋보이게 하는 데 사용했다. 천개 위로 천녀 두 사람이 날고 있다.

천녀들이 하늘을 날면서 음악을 연주하거나 꽃을 뿌리는 모습은 부처의 정토를 찬미하는 것이다. 두 탑 아래에는 사자로 보이는 동물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동쪽 사자는 입을 벌리고 오른쪽 발은 힘차게 땅을 딛고 왼발은 들어 올렸으며 꼬리는 깃발처럼 세 갈래로 나뉘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서쪽 사자는 입을 다물고 오른발은 들어 올리고 있는데 꼬리가 아주 복잡하며 목에 긴 털이 많은 것으로 보아 수사자, 동쪽사자는 털이 없어 암사자로 인식한다. 입을 벌리고 다문 것은 열리고 닫힌 세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음과 양이 합친 모든 세계를 부처가 다스린다는 뜻이 있다. 옥련암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가 요양했던 암자로 유명하다.

부처바위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군위삼존석굴(국보 제109호)과 더불어 석굴암의 원형으로 인식되는 ‘경주 남산불곡(부처골)마애여래좌상(보물 제198호)’이 있다. 남천을 사이에 두고 낭산의 선덕여왕릉과 반대편쯤 되는 지점에 있는데 경주에서는 ‘할매 부처’라 부른다. 높이 1.4미터의 불곡마애여래좌상은 부처골 입구에서 약 300미터 거리에 있는데 높이 3m, 폭 4m 정도의 바위에 깊이 60cm, 높이 1.7m, 폭 1.2m 정도 되는 굴을 파고 그 안에 모셔져 있다.

머리는 깊은 돋을새김으로 일반적인 여래상에서 볼 수 있는 나발(螺髮)없이 두건을 쓴 모습인데 귀 부분까지 덮혀 있다. 이렇게 두건을 쓴 모습은 낭산 마애삼존불의 본존에서도 엿보인다. 얼굴은 약간 숙여져 있으며 어깨는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고 옷은 양 어깨에 걸친 통견(通肩)으로 했다.

두 손을 맞잡은 듯 옷소매에 집어넣어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오른발만을 밖으로 드러내어 부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대좌를 덮은 옷은 아랫단이 장막을 만들어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불상을 여래좌상으로 보기도 하지만 보살상 또는 인물상일 가능성도 있다. 장창골 애기부처(장창골미륵삼존불), 배리삼존불과 함께 남산에 있는 불상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손꼽히는데 대략 7세기 초반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며 선덕여왕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할매부처를 마지막으로 남산지구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36곳과 연계되는 유적의 답사를 모두 마무리한다. 남산이 신라 불상의 보고이자 신라 조각의 산실인데 이는 재료 면으로도 설명이 된다. 남산은 작게 갈라지는 편마암으로 이루어진 경주 주변의 다른 산과 달리 화강암 바위산 때문이므로 조각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산 자락에서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탄생했고 포석정에서 경애왕이 견훤에게 죽임을 당했다. 남산은 신라 건국의 성스러운 곳이자 신라 멸망의 한이 맺힌 곳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자신의 희망을 기원하고 한을 풀기 위해 수많은 불상과 보살상, 탑을 만들어 놓거나 혹은 바위에 새겼다.

있는 그대로 절실한 삶을 표현하였으므로 특별한 예술작품을 만들려 하지도 않았다. 남산은 그대로 부처가 살고 있는 불국토이므로 그 속에서 희망과 한을 하나로 품어가면서 살아가는 묘수를 찾아간 것이다.

남산에 있는 수많은 유산 어느 한 곳 소홀히 할 수 없는 곳이지만 유네스코 세계유산과 이에 연계되는 유산으로 한정한다 하더라도 이들을 모두 답사한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각자 편리한 일정을 할애하여 틈틈이 하나하나씩 주파하면 신라인들의 넋이 깃든 남산의 의미를 새롭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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