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농사 부자 아르헨티나 동포 이창호씨
쌀 농사 부자 아르헨티나 동포 이창호씨
  • 부에노스아이레스=박채순 해외기자
  • 승인 2015.06.09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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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페 주 산 하비에르지역에 3,400헥타르 농장 운영

▲ 이창호 씨 소유 농장의 쌀 농사 현장.
큰 목장을 경영하는 게 꿈이었던 한 청년이 이민지 아르헨티나에서 세계 한인 가운데 쌀 농사를 가장 많이 짓는 농부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르헨티나 산타페 주(Provincia Santa Fe) 산 하비에르(San Javier)지역의 새마을농장 이창호씨가 그 주인공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북동쪽으로 650km 지점 산타페 주 산 하비에르지역에 3,400헥타르의 농장과 거대한 도정공장을 운영하는 이창호씨는 1981년에 아르헨티나에 이주했다.

산 하비에르 농장은 197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들의 해외이주를 주선하고 부족한 식량을 해외에서 안정적으로 생산하여 조달 받을 목적으로 정부에서 추진했던 사업이다. 당시 이 농장에 이주시키기 위하여 정부는 각도에서 대상자를 1명씩 엄선하여 11명의 농업이민자를 모집하였다.

▲ 농장에서 이창호 씨.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급서로 이 일을 추진하지 못하다가, 1981년 전두환 정부에 이르러서야 이 프로젝트를 성사시킨다. 당시 정부에서는 해외개발공사를 통해서 산타페 주 산 하비에르 지역 농장 2,714ha를 구입하여 11세대를 입주시켰다.

여기 영농 이민자의 선발 조건으로 실제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가능한 한 일손이 많은 가족을 선택하여 정부에서 구입한 농장에 차후 상환을 조건으로 이민을 보냈다.

한국 정부에서 당시 정부는 산 하비에르 농장 2,714㏊를 해외개발공사를 통해 구입하고 입주 농민들은 3년 거치 5년 분활 상환 조건으로 하고 아르헨티나에 도착한다. 이창호씨는 목축업의 꿈을 안고 농촌지도소의 주선으로 덴마크 농업을 시찰한 경험이 있으며, 이민 전에 경북 포항에서 7,500평의 농사와 도정 공장을 운영한 경험도 있었다.

그러나 큰 꿈을 갖고 시작한 아르헨티나의 현지에서의 삶의 현실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때 마침 도착한 해에는 아르헨티나와 영국 사이에 말비나스(영국명 포클랜드)전쟁이 발발하여 국가 사회가 혼란을 겪었던 때였다.

▲ 하늘에서 본 산 하비에르 농장 모습.
이런 여파로 한국 정부에서 구입한 토지는 전쟁 후에 가격이 폭락하여 실제 시세 보다 훨씬 높은 가격으로 상환해야 할 입장에 처했다. 한인들은 어디를 가나 자녀 교육이 중요한데, 시골에서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이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거기다가 당시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동포들이 의류업에 종사해서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알려지면서 농업 이주자들이 많이 동요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농업을 하기로 작정하고 온 이주자들 11가구중 처음 9세대가 수도로 이주를 했고, 이창호씨와 한 분만이 남게 되었다.

목장을 크게 한번 하자고 시작했던 이창호 씨의 희망도 점점 멀어지게 된 것이다. 결국 마지막까지 남았던 동료도 미국으로 떠나게 되어 결국 이창호씨는 모든 의무와 책임을 떠 안고 혼자 남게 되었다.

농사는 계속 지어야 했다. 동료의 지분 상환 등을 위해 돈도 추가로 필요했다. 그래서 당시에 사육하던 1,000두의 소를 전부 팔아야 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인들로부터 상당 한 돈을 빌려서 위기를 넘기곤 했다.

정부와의 맺은 원리금 상환 약정을 제때에 이행하지 못하자, 정부는 여러 차례 특사를 파견해 상환을 독려했다. 남미의 농업 이민이 전반적으로 부실해져 한국 정부의 입장에서도 특별관리를 하는 것이었다.

▲ (왼쪽 상단) 농장의 새떼, (오른쪽 상단) 파라나 강으로부터 농장으로 관개수를 보내는 장면, (왼쪽 하단) 도정공장과 곡물 저장 창고 사일로, (오른쪽 하단) 초기 입주시의 가옥들.
결국 밀린 이자 등을 일부 탕감 받고 1991년에 비로소 정부에 채무를 전액 상환할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 농사도 한국의 기술적인 집약 농업에 비해 단위당 소출량이 매우 적어서 한국의 1헥타를 생산량이 이 농장의 100헥타르의 소출량과 비슷했다.

이창호씨는 정부의 채무를 정리하고, 그 후에도 토지를 더 구입하고 개간하여(개간비 Iha 당 디젤유 3,000Liter 상당 가격 소요) 약 3,400헥타르를 소유하고 있으며, 2,000헥타르 경지 면적에서 쌀 농사를 짓고, 육우도 500두 정도를 사육하고 있다.

이씨는 2,000ha의 쌀 농사지만 아르헨티나에서 쌀 농사는 하늘의 영향이 90%에 해당하고, 사람의 정성과 노력은 겨우 10%밖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첫째, 용수 문제다. 홍수로 강수량이 넘치거나, 가뭄으로 메말랐을 경우 농작물을 거둬 보지도 못하고 논 바닥에 파 엎는 경우가 빈번하다. 오리 떼와 새 떼와 관련된 피해도 상당하다. 그는 “오리가 하늘을 덮으면 하늘이 새까맣게 보일 정도다. 오리 떼가 한번 덮치면 20-30ha분량을 다 해 치운다. 오리 떼와 새떼들 없는 세상에서 제발 살고 싶다”고 푸념한다.

느닷없이 우박이 내려 피해를 볼 때도 있으며, 병 해충이 특히 심한 해에는 소출이 엄청나게 줄어든다는 것이다.

▲ 왼쪽부터 장영철 위원장, 서병덕 위원, 이창호 씨.
관개수(灌漑水)를 위해 파라나 강에서 농장으로 이은 대 용량의 배수관을 묻는 등 농사일은 끝이 없다고 한다. 한번은 토요일 오후에 종업원이 다 돌아가고 혼자 일을 하는 데,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워 집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온갖 가시덤불에 할퀸 채 새벽 5시가 돼서야 돌아온 적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한국 정부는 아르헨티나에 이창호씨의 산 하비에르 농장보다 7배 이상이 더 큰 야타 마우카(llajta-mauca) 땅을 가지고 있다. 1978년 8월 외무부가 구입하여 많은 가구의 농업이민자 입주를 목표로 시범농장을 조성하기 위한 땅이다. 이 땅은 강수량이 부족하고 고온이며 소금기를 많이 함유하고 있어서, 경작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구입한 지 40년이 되도록 쌀 한 톨, 야채 한 포기 생산하지 못하고 방치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5년에 남미 농업이민 추진을 결정하고 수 차례 조사단을 파견하여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와 파라과이 등에 토지를 구입하여 농업 이민을 장려하려고 했으나 불행하게도 정부 주도 이민은 대부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흔히 말하듯 이주자 및 정부에서 충분한 사전 정보가 없어, 현지 정부와 문제가 있었거나 남미의 광활한 토지에서 농업을 한국식 소농으로 인식했거나, 현지의 환경이 매우 달라서 결국 낯선 땅에서 난관을 극복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 (왼쪽 사진) 부에노스 아이레스 자택에서 이창호, 김경애 부부, (오른쪽 사진)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서병덕, 장영철, 이창호 씨.
더욱이 구입한 땅이 법적 하자가 있거나 농지로 쓸 수 없는 경우가 많아서 아르헨티나의 야타 마우카 농장처럼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산 하비에르 농장은 당초 목적대로 여러 가구가 생활하지 못하지만, 정부의 의도에 어느 정도 부합된 예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농장에서 1년에 약 10,000톤의 벼를 생산해서 하루 30톤 가량을 자체 도정 공장에서 가공해, 새마을 쌀 등의 상표로 아르헨티나 한인들과 현지 등에 판매하고, 중동 등에는 도정하지 않은 벼를 수출한다고 한다.

이창호씨가 짓는 쌀 농사 2,000ha는, 아마 전 세계 한국인들 중 가장 많은 쌀 농사일 것이란다. 한국이 연해주 등에 많은 토지를 보유하고 있으나 이는 대부분 기업이나 법인에서 소유하고, 사슴과 낙농, 비육우 등 축산업과 과일, 버섯 등을 재배하고 농작물일 경우에도 단일 작물은 그처럼 많이 재배하지 않기 때문이다.
슬하에 3 자녀를 둔 이창호씨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온 아들 가족과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거주하며 산타페에 있는 농장을 오고 간다.

그가 청년 시절 품었던 낙농의 꿈은 벼 농사와 목축업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결코 이 땅이 우리만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들이 이룬 성과가 결코 본인들의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그의 성취는 일찍 농장을 구입하고 이주를 알선했던 한국 정부, 비록 끝까지 함께 하지 못했지만 한국에서부터 한 뜻을 갖고 이주했던 이민 동료, 그리고 지켜 보면서 격려와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공무원과 한인 동포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며, 그들의 공으로 돌린다.

이창호씨 부부는 초기에 아이 셋을 기르는데 셋째 아이를 보호할 수가 없어서 세 살짜리 막내를 오빠와 함께 학교에 따라 보냈다. 학교에서는 “세 살짜리가 영특하다”며 정식 과정을 이수하게 해 주어, 제 나이 보다 훨씬 일찍 졸업을 하게 됐다는 이야기도 이제는 웃으면서 할 수 있단다. 언제부턴가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말을 가훈처럼 항상 염두에 두고 이제까지 살아왔다는 것이다.

▲ 추수 장면.
이창호씨는 허허 벌판에서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살며 의지할 사람이라곤 그의 부인 김경애씨뿐이었다고 말했다. 김경애씨는 현재 아르헨티나 부인회 회장 직을 맡고 있다. 서예가인 그녀는 평통 자문위원으로 아르헨티나 한인사회에 많은 봉사를 한다. 그들 부부는 자기들이 이룬 것을 뒤돌아 보며 가능한 한 공동체를 위해 살려고 한다. 그들이 있어야 할 곳엔 빠짐없이 나타나, 그 곳에 미력이나마 도움이 되려고 노력한다. 이창호 농부는 작은 거인이다.

※편집자주: 1965년 한인이 최초로 아르헨티나에 이주한 이후 아르헨티나 한인 사회는 올해로 이민 50주년을 맞는다. 아르헨티나 동포들은 이를 계기로 “아르헨티나 한인 이민50주년사 편찬위원회”(위원장 장영철)를 발족, 한인들이 반 세기 동안 아르헨티나에서 걸어 온 발자취를 조사해 기록으로 남기고,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하기로 했다.

이 조사 편찬의 일환으로 장영철 이민사 편찬위원장과, 서병덕 편찬위원이 이창호씨의 산 하비에르 농장을 방문, 2박 3일 간 머무르며 조사활동을 벌였다.  본지 해외기자가 동행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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