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열時論] 평남도청을 폭파한 임신부 안경신선생
[전대열時論] 평남도청을 폭파한 임신부 안경신선생
  • 전대열<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 승인 2015.06.1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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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 땅에 눈독을 들였던 나라는 중국이 원조다. 만주일대를 휩쓸며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고 있었던 고구려는 국경을 사이에 두고 필연적으로 중국과 맞붙을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었다.

수나라는 대군을 몰아 고구려를 침범했으나 을지문덕장군의 전략전술에 말려들어 살수(지금의 청천강)대전에서 몰살을 당한다. 30만 대군중에 살아 돌아간 사람이 2천명도 채 못 되었다는 기록을 보면 수나라는 이 원정에서 국력을 상실하고 망국의 길을 재촉한 셈이다.

그 뒤를 이은 당나라가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황제가 친정에 나섰으나 연개소문과 양만춘장군의 굳건한 의지로 안시성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황제 이세민은 화살에 맞아 애꾸눈이 되어 패퇴하는 치욕을 맛봐야 했다.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쓰러뜨린 후 통일국가를 이룩했지만 만주일대의 광활한 대륙은 이때부터 중국의 차지가 되었다. 한반도와 중국은 지리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어 영토분쟁이 그칠 사이 없었지만 현해탄을 사이에 둔 일본은 달랐다. 그들은 물산이 풍부한 조선 땅을 넘보며 해안일대의 노략질을 거듭했다.

분열된 제후를 통일한 풍신수길은 임진왜란을 일으켜 분탕질한다. 조선왕 선조는 맨 먼저 도망치고 왜군은 서울을 거쳐 평양까지 단숨에 점령한다. 이들을 저지하기 위하여 수많은 의병들이 일어났다.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한다.

이여송이 선봉장으로, 심유경이 전권대사로 왔으나 전투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왜군과의 협상만을 내세우며 온갖 금은보화만을 챙기려한다. 이순신장군의 눈부신 해전이 왜군의 발목을 잡지 않았더라면 조선 땅은 중국과 일본이 나눠가지는 운명으로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왜란이 끝난 후 조선정부는 일본막부의 요청을 받아드려 사명대사를 통신사로 임명하고 포로송환 등 평화적인 화해를 이뤄 260년 동안 한일평화시대를 구축한다. 이러한 전통을 어긴 이등박문의 간계로 1910년 강제적인 한일합병이 선포되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처절한 전투를 전개했지만 정예군과 신식무기를 당할 수는 없었다.

1919년 3월1일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날이다. 전국에서 ‘대한독립만세’소리가 메아리치고 이를 제지하려는 일본군은 총칼을 휘둘러 무려 1만5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수만 명이 감옥에 갇힌다.

이 때 가냘픈 여성의 몸으로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이들이 수없이 많다. 유관순 같은 학생도 있었지만 노래하고 춤추며 서예를 익히던 예인(藝人) 기생들도 과감하게 앞가슴으로 총탄을 받았다. 평양에서 거사에 참여한 안경신(安敬信)은 평양여고보 2학년으로 유관순과 동년배다.

당시 평양은 서구문물이 들어오면서 기독교가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곳이다. 평양의 3.1만세운동은 이승훈의 총지휘 아래 기독교계의 신한청년단 선우혁 등이 앞장섰다. 이승훈은 강제합병 직후 일제총독부가 조선인을 겁주기 위해서 조작한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실형을 살았다.

여기에 힘을 보탠 조직이 상해임시정부 국내여성항일단체인 대한애국부인회다. 안정석이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의 집은 평양에서도 품격이 높은 고가(古家)로 일본경찰들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대갓집이었다.

그의 시동생이 현직군수였다. 이를 배경으로 안정석은 여성독립운동의 선봉역할을 했으며 안경신의 윗선이었다. 평양의 3.1운동은 서울과 거의 같은 시간에 시작했으며 안경신 역시 체포되어 29일의 유치장 신세를 진다. 석방 후 대한애국부인회를 통한 군자금 모집에 나서 무려 2천4백원을 모았다.

쌀 한 가마니에 1원하던 시절이니 큰돈이었다. 안경신은 임시정부 교통부원으로 이 돈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조직이 일경에 발각되어 모두 체포될 때 안경신은 중국으로 피신하여 독립을 위해서는 무력투쟁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스스로 폭탄투척을 자원한다. 당시 그는 임신 중이었는데 남편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안경신이 소속한 광복군총영에서는 영국인과 광동인을 초빙하여 폭탄제조를 학습하고 서울과 평양을 겨냥한 폭탄투척 용사를 파견한다. 그러나 서울에 파견된 이들은 거사 전날 체포되어 실패했으나 제2목표였던 평양에서는 평남도청을 폭파하는데 성공한다. 평양경찰서는 비 때문에 폭탄이 젖어 실패했다.

여기에는 김예진, 김효록, 우덕선, 장덕진, 박태열, 안경신이 직접행동에 나섰다. 1920년8월3일 밤의 거사였다. 안경신은 이듬해 3월20일 체포되어 10년형을 받고 8년 후 가석방된다. 출산하자마자 형무소에 들어갔으나 어린 아이는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다. 코리아 시낭송협회장 이경선은 “무력투쟁에 앞장선 어미 뱃속에서 강열한 폭음과 투탄 폭살소리에 놀라 시력을 잃었을까나···”하면서 안타까운 심정을 애절하게 읊는다.

안경신은 고문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형무소 안에서도 독립만세를 부르며 “아녀자라고 어찌 나라 잃은 설움이 없으리까? 조국이 있으매 내가 있으리니 대한의 여성들이여! 주저말고 분기하라! 분기하라!”고 외쳤다.

여권이 무시되던 여성비하시대에 태어났지만 모든 독립운동 열사들의 뒤를 이은 장엄한 안경신의 생애는 19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국민장(독립장)을 수여 받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죽음과 관련된 행적은 찾을 길이 없다. 늦게나마 삼가 명복을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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