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열時論] 고문희생자 전 국회부의장 김녹영선생
[전대열時論] 고문희생자 전 국회부의장 김녹영선생
  • 전대열<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 승인 2015.07.13 08: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제 강점 36년 헌병경찰통치를 경험했던 우리 민족은 고문에 대한 트라우마가 유난히 심하다. 독립 운동자에 대한 일제의 가혹한 형벌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강제합병 초기 105인 사건을 일으켜 수많은 독립 운동자들을 고문하고 전성범 의병장 등을 전격적으로 사형 집행한 것은 오직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조선민족의 궐기를 잠재우기 위한 수단이었다.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대외적인 조선독립을 기하려고 했던 애국지사들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일제에 투항한 것은 모두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이 본의 아니게 친일분자가 되어 오늘날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아무튼 이러한 가혹행위로 인하여 3.1만세운동과 6.10만세운동 그리고 광주학생운동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민족적 거사는 요원의 불길로 타올랐으나 유관순 안창호 윤동주 등 엄청나게 많은 독립 운동자들은 일제경찰의 고문 희생자로 세상을 떠야 했다.

36년의 기나긴 고통을 견뎌낸 우리 민족은 제2차 대전의 연합국 승리로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게 된다. 신탁이냐 반탁이냐 하는 갈림길에서 미국과 소련의 국제정치의 농단으로 한반도는 엉뚱하게 남북이 분단된다.

패전국인 일본을 두 갈레로 갈랐다면 어느 누가 봐도 그럴듯하겠지만 일본의 희생자였던 조선은 분단될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쪽은 소련의 꼭두각시 정권인 김일성이 집권자로 나섰고, 남쪽은 미국의 비호를 받은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각기 독립한 남북은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민족상잔의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르며 지금까지도 70년의 세월을 분열의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다.

그나마 남한에서는 12년의 이승만독재를 쫓아내고 4.19학생혁명을 성취하는 쾌거를 이룩했으나 1년 후 박정희에 의한 쿠데타로 30년에 걸친 군사독재정권이 탄생한다.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은 국민에 대한 가혹한 탄압으로 언론자유를 짓밟으며 국민의 알 권리를 묵살했다.

이에 저항하는 세력은 가차 없이 응징 받았으며 투옥과 고문만이 판을 쳤다. 5.18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은 광주를 비롯한 민주화 항쟁세력을 총칼로 도려냈다. 무시무시한 고문을 무기로 삼은 군사정권은 민주 운동자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줬을 뿐더러 그 후유증은 오랜 세월이 흘러간 뒤에도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지난 7월10일 국회헌정기념관에서는 30년 만에 전 국회부의장 김녹영선생의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1985년 7월10일 12대 국회 부의장으로 선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한 많은 세상을 뜨신 백우 김녹영선생은 한마디로 민주화를 위해서 독재정권과 싸우다가 그들의 희생양이 된 분이라고 말해야 가장 옳은 표현이 될 것이다.

그는 이미 4.19혁명 당시 자유당에 맞서 빛고을 광주에서 자유당 규탄연설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모진 폭행을 당했다. 고문이란 원래 사건을 크게 만들고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서 조작하는 수사기법이다.

그러나 김녹영이 자유당 경찰의 희생으로 등장한 것은 오직 광주시민들을 선동했다는 단 한 가지 이유에 불과했다. 자유당은 만세불변 이승만 국부를 모시고 천하를 호령하는 처진데 감히 일개 장성촌놈이 광주까지 올라와서 현란한 웅변솜씨로 선동을 자행하다니 가만 놔둘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억지 답변을 요구하는 고문은 ‘매에 장사 없다.’는 속담대로 거짓으로 자백하면 우선 고통은 잠시 면하게 된다. 하지만 무자비한 경찰력의 폭행은 감정이 섞인 악랄하기 그지없는 것이어서 끝없이 계속되는 특징이 있다. 4.19희생자 중에 중앙대 서현무양 역시 경찰폭행의 희생자로 두 달 후 숨진 일도 있다.

김녹영은 이 때 입은 부상으로 세 달 동안 병원에서 꼼짝하지 못하는 중상을 당했다. 유명세를 탄 그는 4.19직후 실시된 지방의원 선거에서 전남도의원에 당선하고 8대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한다. 그러나 곧 이어 발표된 10월 유신은 헌정이 중단되고 국회가 해산되는 격변을 불러왔다.

그는 다른 국회의원들과 함께 중앙정보부에서 가혹행위를 당해야 했으나 9대국회와 10대국회의원으로 연거푸 당선한다. 민주통일당 양일동당수와 장준하선생, 김홍일장군, 정화암선생 등 혁혁한 독립 운동가들과 함께 한 일관된 정치행보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양일동의 급서로 민주통일당 총재권한대행으로 취임한 그는 미처 정신도 차리기 전에 밀어닥친 신군부 5.18쿠데타에 다시 영어(囹圄)의 몸이 된다.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남산지하실에서 두 달 동안 모진 고문에 시달렸다. 필자 역시 함께 고문을 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김녹영은 이 때 회복하기 어려운 병마를 얻었으나 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필사의 신념으로 광주에서 압승을 거둔다. 그리고 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고문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62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후인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다. 그것은 민주화를 위한 모두의 집념이 되었다. 이석현국회부의장은 30주기 추도식위원장을 기꺼이 수락하였으며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서울신학대학교 유석성 총장, 5.18부상자회 김후식 회장은 추모사를 통해서 선생이 남긴 고귀한 민주정신을 받들자고 힘줘 말했다. 선생의 명복을 빈다.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한신잠실코아오피스텔)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