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택 총재, "4.19 정신살려 북한민주화에 매진할 것"
이기택 총재, "4.19 정신살려 북한민주화에 매진할 것"
  • 이종환 기자
  • 승인 2011.01.30 20: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시민사회 지도자 워크숍에서 특강

 
“북한이 핵을 가지면, 통일이 되지 않습니다. 핵도 있고 부강한 통일 한반도를 주변국들이 반길 리가 없잖아요”
이기택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이 지난 19일 양평 생명연수원에서 열린 한국시민사회 지도자 워크숍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강사로 초빙돼 강연을 한 것.

그는 핵을 갖고, 천안암사건과 연평도사건을 일으킨 것은 김정은을 후계자로 세우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밝히면서 “북한에서 큰돼지 작은돼지 함게 잡아먹자는 구호가 나도는 등 북한이 흔들리는 조짐이 많다”고 소개했다.

그는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으로 지내면서 많은 지역을 방문해 강연했다고 말하고, 물러나게 되면 4.19의 반독재 민주혁명 정신을 되살려서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두시간에 걸친 그의 강연을 간략하게 정리해 소개한다.

지난해 말 전주에 가서 서예를 하는 운제선생을 만났다.그의 글씨를 한 점 받았는데, 초서로 돼 있어서 뜻을 알 수가 없었다.그래서 중국 청화대 교수를 지낸 정인갑선생한테 이 글을 보여서 뜻을 물었다.
송나라 명재상 범중업의 말을 담은 글이었다.

천하의 근심을 먼저 걱정하고, 천하의 낙은 나중에 즐긴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
이 말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사실 나는 평생 정치를 해온 정치인이다. 3대 정권을 물리치는 중심에 있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을 물러나게 했다. 박정희 정권이 물러나는 데도 내 역할이 컸다. 이야기를 하자면 길지만, 당시 신민당 대표 선출 때 박정희대통령은 온건파인 이철승후보가 당대표로 선출되기를 바랐지만, 나는 선명야당을 주장하는 김영삼후보를 밀었다. 그 결과 급기야 국회에서 YS를 제명시키게 되고, 그게 부마사태를 불러일으키면서 유신정권이 무너지는 계기가 됐다.그해 5.30 전당대회에서 YS의 손을 들면서 10.26이 일어났다는 얘기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전두환 정권이다. 전두환 정권은 6.10 항쟁을 통해 무너졌다. 여기에 불을 당긴 것이 우리가 시작한 개헌투쟁이었다.당시 DJ와 YS는 정치활동이 금지돼 있었다. 나는 이민우 총재를 내세우고 개헌을 위한 현판투쟁을 시작했다. 개헌 현판식을 서울 당사에서 하려고 했으나 경찰이 막아서 실패했다. 그래서 부산에서 시작했다. 당시 개헌 현판식 행사 계획을 아무 신문도 보도하지 않았다. 사람을 모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택시를 태워서 찌라시를 뿌리게 한 것이다. 그래서 당일날 모인 사람이 13만명이었다.

그게 불씨가 돼 대전 청주 대구로 현판 투쟁이 이어졌다. 부산의 현판식이 실패했더라면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미뤄졌을지 모른다.이 현판식이 성공해서 6.10 항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전두환 정부가 손을 들고 직선제 개헌으로 간 것이다.

나는 29세 때 국회로 들어갔다. 4.19 후 대학을 졸업하고 부산의 섬유회사에 취직했다. 누이가 사주로 있던 태광산업이다.그때 나는 본사 영업과장을 했다. 북유럽에 스웨터를 수출한 것도 내가 했다. SK그룹의 선대 최종원회장이 제주에서 전경련 워크숍을 하면서 야당총수이던 나를 불러서 강연을 해달라고 했을 때 이 얘기를 했더니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내 호가 대봉이다. 큰 봉이다는 뜻이다.내가 회사에 얘기했다. 월급을 세배만 달라. 정직하게 일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받은 돈으로 동창과 후배들을 지원하고, 술도 샀다. 부산 대봉집에 가자면서 많은 후배들이 왔는데 평생 그때만큼 실컷 돈을 쓴 적이 없었다.그럴 무렵 유진오 당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전국구 후보로 추천을 받아 들어갔다가 유진산 총재때 동래지역구가 비어서 7선까지 했다.

나는 대통령 자리를 비껴 다녔다. YS가 3당 합당을 했을 때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나중에 YS와 화해하면서 그의 집에서 같이 식사를 할 때였다. YS가 벽을 보면서 욕을 하길래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3당 합당때 따라 왔으면 그 자리(대통령)가 당신 자리 아니냐”고 했다.

나는 평생 야당만 했다. YS와 결별한 후 DJ와 민주당을 할 때였다.DJ가 정계은퇴를 번복하면서 대통령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세우고는 내게 박지원씨를 세번이나 보내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거절했다. 정계은퇴를 선언했다가 번복하는 것은 명분으로 안된다고 했다.아마 그때 내가 눈을 감고 밀었으면, 아마 노무현 시대가 없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번 정부 들어서 민주평통을 맡았다. 나는 과거 수석부의장과는 달리 강연을 많이 다녔다.나는 비핵개방 3000이라는 MB의 대북정책이 우리로서는 최상의 정책이라 믿고 있다.핵을 없애고 개방을 하면 국민소득 3000불이 되도록 돕겠다는 것이다.

이 정책을 내 나름의 목소리로 많은 지역을 돌면서 강연으로 소개했다.워싱턴에 갔을 때가 잊혀지지 않는다. 워싱턴 협의회장은 북한도 여러 차례 다녀온 분이었다.그러나 내 연설을 듣고는 “북한 핵이 우리 것 아니냐고 생각했는데, 연설을 듣고 제 생각을 바꿨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지난 10여년간 해외한민족교육진흥회를 맡아서 조선족 학교 선생들에게 시상을 하는 등 조선족의 정체성 교육에 공을 들였다.조선족이 잘 되어야 한중관계도 잘 된다는 게 내 신념이다.

앞으로는 4.19 정신을 살려서 북한 민주화에 노력할 것이다.4.19 이전에는 통일 정책이 북진 멸공뿐이었다. 4.19때 비로서 우리의 통일 정책이 나왔다. 북한의 학생들도 판문점으로 내려와라, 우리도 올라간다. 통일을 논하자고 했다. 이것이 남북관계의 전환점이 됐다.나는 앞으로 4.19의 민주정신과 통일정신으로 북한을 민주화시키고, 한반도의 통일을 이끌어 내는데 여생을 바칠 예정이다.

박정희 정권이 어떻게 해서 부패하지 않고 경제부흥에 성공했는지 아는가?나는 우리의 3.1운동 정신과 4.19 정신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정부는 모두 부패하고 타락했다.하지만 우리는 3.1정신과 4.19 정신이 있어서 이것이 우리나라 민주화 산업화의 자양분이 됐다.나는 이제 4.19 정신을 더욱 발전시켜서 이제 북한을 민주화시키는 일에 매진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한신잠실코아오피스텔)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