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고] 조선족문학 거장 김학철 선생 인상기 
[해외기고] 조선족문학 거장 김학철 선생 인상기 
  • 남룡해 사진 작가
  • 승인 2020.08.11 11: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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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조글로에 전재한 길림신문 특집인터뷰 ‘투혼의 작가 영혼의 메시지’를 읽고 고 김학철 선생에 관해 나도 한마디 하고자 한다.
 
1980년대에 김학철 선생과 한 건물에서 함께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때 작가협회는 주문학예술계련합회(卅文联) 건물 3층에 있었고 우리 사진작가들은 4층, 천지잡지사는 5층에 있었다.

우리는 김학철 선생 복권 후반기부터 전부를 목격했는데 당시엔 쌍지팡이를 이용하는 그저 그런 작가로만 알았다가, 언젠가 김학철 작가님이 황포군관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알았을 땐 큰 호감을 가졌고, 좋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기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업 작가는 매주 월요일 오전에만 사무실에 나와서 회의하고 소통하고 나머지 시간은 전부 자택에서 창작하기 때문이어서, 건물 계단에서 만나면 그냥 인사하고 스쳐 지나갈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1989년 9월 나는 서울 종로구 관철동 파인힐에서 개인 사진전을 개최했는데, 어느 날인가 전시회를 주최해 주신 지인 류재정 선생이 갑자기 나를 찾아 “오후 시간에 중요한 손님이 전시장으로 찾아가니 잘 모시라”고 했다.

부랴부랴 정장을 입고 전시장에 나갔는데 오후 3시경에 풍채가 아주 늠름한 분이 수행 인원들과 함께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함께 들어오는 주인공이 쌍지팡이를 짚으신 김학철 선생 부부였다. 너무나 놀라웠고 뜻밖이었다.

주최 측 류재정 선생도 김학철 선생을 알아보고 이 기회에 김학철 선생에게 식사 대접을 하겠다고 난리였으나, 같이 온 분과 저녁 스케쥴이 있기에 다음날에 하자고 그냥 돌아가셨다.

그때 김학철 선생은 중국에서는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에서는 꽤 알려진 인물이었다. 한국대학교 교재에까지 올라간 항일투사였고, 전시장을 찾았을 즈음 한국에서 KBS 해외동포문학상을 수상했다.

며칠 후 저녁에 종로 모 뷔페에서 김학철 선생과 부인 그리고 나와 류재정 선생 네 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기억건대 장소는 눈 부신 불빛으로 휘황찬란했고 매우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다.

우린 인사 나누고 자리를 하고 뷔페식당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뷔페식당을 처음 목격하셨기에 아주 놀라운 표정을 하셨고 자리에 앉으시면서 저하고 중국에서 이런 음식을 이렇게 마음대로 먹는다면 금방 꽝이 날 것 같다며 환히 웃으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렇게 우리는 같은 연변에서 왔기에 안부를 묻고 답하면서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가졌다. 어떻게 전시장에 오시게 됐는가를 물었더니 하시는 말씀이 그냥 KBS방송국에서 생방송 인터뷰를 듣고 연변 조선족 동포 사진작가가 전시회를 개최했다기에 근처 호텔에 투숙하고 시간도 좀 있고 해서 호기심으로 찾아왔다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종로 어느 호텔까지 모시고 갔고 다음 날에 또 만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 이듬해인 1990년 류재정 선생이 연변을 방문했다. 그때 류재성 선생을 모시고 김학철 선생 댁으로 찾아갔다. 자택 자리는 지금 세기 호텔 자리였는데 약 60~70여 평방미터 쯤 돼 보였고 정부가 문화예술 분야의 거목들을 위해 지은 문화저택 아파트라고 했다.

다리가 불편하셔서 특별히 1층을 배정받았다고 했다. 서재로 생각되는데 책자가 꽉 차 있었다. 

반겨 맞는 그는 조용한 분이었다. 억양이 매우 부드러웠고 목소리도 높지 않았으며 남도 말이 섞인 어조였는데 말씀 톤이 낮고 천천히 알아듣기 좋은 편이었다. 인상 속에 그냥 우리 생활 속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보통 서민과 똑같았다.

그분의 글이 아주 예리하고 불타오르고 격정적인 것에 비해, 실제 모습과 일상은 너무나도 평범하고 소박했다. 고 김학철 선생의 그때 모습을 상기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많은 이들이, 그리고 각계 문단에서도 그이를 당대 중국문화 거장 노신 선생과 비교하고 있다. 참으로 우리 문단의 거장이 되시기에 손색없는 분인 것만은 틀림없다.

김학철(金學鐵 1916∼2001.9.25) 소설가·독립운동가
함경남도 원산 출생. 본명 홍성걸. 1930년대에 중국으로 망명, 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의용대에 입대했다. 1941년 중국 하남성 태항산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부상, 일본 감옥 무연묘지에 다리 한 짝을 묻고 종전(해방) 후 귀국했다. 서울에서 1년 동안 창작 활동을 하다가 월북, 평양에서 신문기자 등을 역임하다가 1950년에 북경으로 들어와 중앙문학연구소의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1952년 연변 자치주에 정착한 그는 모택동 독재를 비판한 정치소설 <20세기의 신화>(서울, 1996)을 써 10년 징역살이를 하는 등 24년 동안의 시련을 겪었다. 1980년 복권된 그는 중국 연변에서 집필 활동을 하다가 2001년 작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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