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봉철 회고록①] 제주 4.3 그해 마지막 말 남기고 떠난 아버지
[현봉철 회고록①] 제주 4.3 그해 마지막 말 남기고 떠난 아버지
  • 현봉철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장
  • 승인 2021.05.17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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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직후 제주도에서 출생, 4.3사태 때 부친 실종, 홀어머니 밑에서 태권도에 전념해 전국체전 우승, 월남전 참전, 중동 건설붐때 사우디 건설현장에서 활동, 쿠웨이트 한인회장과 민주평통 지회장으로 봉사.... 현봉철 회장의 생애는 이처럼 우리나라 현대사의 굴곡과 맥을 함께 하고 있다.한국 경제발전사와도 궤도를 같이 하고 있다. 현봉철 회장의 삶을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쿠웨이트 건설현장. 현봉철 회장은 쿠웨이트에서 Mechanical Engineering & Contracting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쿠웨이트 건설현장. 현봉철 회장은 쿠웨이트에서 Mechanical Engineering & Contracting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1968년 7월 제3회 전국 중-고-대 태권도 개인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지역마다 체급별 도 대표로 선별된 선수들이 참가하는 대회였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이 모인 셈이다. 나는 밴텀급에서 제주도를 대표해 나왔다. 대회 참가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예선에서 탈락한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준비하였고 투철한 각오가 서 있었다.

예선과 시합을 수차례 거듭하면서 상대 선수들의 실력을 육감적으로 파악했다. 그럴수록 자신감도 커졌다. 결승을 앞두고도 불안하거나 초조함을 느끼지 않았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시간이었지만 부담이 없었다.

결승 경기가 시작됐다. 심리적인 우세가 앞서서인지, 큰 무대 체질이었는지, 평소에는 잘되지 않던 기술도 막상 시합에서는 매끄럽게 실현할 수 있었다. 얼마 후 밴텀급 우승자가 판가름 됐고 그해 우승자는 나였다.

시상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전에 혼자 밖으로 나갔다. 대회가 열렸던 한성여고 체육관 뒤뜰 나무 밑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를 쓰러뜨릴 뻔한 어려웠던 고비들과 치열했던 연습 과정들, 매번 힘을 주시고 위로를 해주셨던 어머니 얼굴과 도움을 주셨던 선배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토록 고대하던 우승을 거머쥔 것이 실감 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론 너무 감격스러웠다.

암만소망의 집 태권도심사 대회.

시간이 조금 지나 시상식이 열렸다. 나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사람들이 축하가 쏟아졌다 문무용 관장님이 오셔서 “잘했어” 하고 짧게 칭찬을 해주셨다. 운동을 시작한 지 3년이 안 된 제주소년이 이룬 성과였다.

시간을 15년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너무도 연약하고 뼈가 가늘어 ‘새 뼈’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아이가, 훗날 태권도로 전국대회 금메달을 따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숱한 역경을 견디고 손에 쥔 승리였기에 의미가 더욱 각별했다.

나는 1948년 10월 2일 제주도 시골 가난한 농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행방불명이 되었다. 1945년 광복 직후의 시기를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겪어본 사람이라면, 사람이 돌연 “사라진다”고 하는 기이한 일이 당시엔 수도 없이 많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것이다. 아버지는 정말 바람처럼 사라졌고 어머니는 어린 2남 1녀와 함께 홀로 남겨졌다. 내가 태어난 지 1년도 되기 전이었다.

후에 어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는 집에 있는 소를 팔아서 일본으로 밀항하는 비용으로 쓰면 좋겠다고 어머니께 몇 번이고 보채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일본 해군에서 복무하면서 더 넓은 세상을 보았고 세상 물정을 알아 제주에 혼돈이 오고 있다는 것을 예감하고 계셨으리라. 앞날을 한 치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뒤집어지고 있고, 좌도 우도 분별할 수 없도록 혼란스러워질 것이니 혼란한 정세를 잠시 피할 필요를 느끼셨던 듯했다.

쿠웨이트 건설현장.

당시 어머니는 거절했다고 한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소를 팔아서는 앞으로 생계는 어떻게 꾸릴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문제들이 어머니에게는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이제 해방이 되고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데, 최소한 소는 있어야 가족이 같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되신 것이다. 어머니 반대로 밀항을 할 수가 없게 되자 아버지는 주변 사람들과 친척에게 밀항자금 지원요청을 했으나 여의치가 않았다 한다. 아버지는 갈피를 잡지 못했고 떠돌기 시작했다.

48년 4월3일이 왔다. 바로 요즘 제주 4.3사건으로 불리는 날이며, 내가 태어나게 여덟 달 전이었다. 제주도는 이미 혼란한 곳이지만 이날은 혼란과 갈등을 말 그대로 폭발시켰다. 당시 제주에는 산 사람, 폭도, 빨갱이 등으로 불리던 사람과 경찰 사이에 밥 먹듯 폭력이 오갔다. 지금에 와서 좌와 우의 계승자들이 서로 저쪽을 가해자라고 우기며 싸우지만, 당시는 그런 얘기가 의미가 없을 정도로 폭력이 뒤죽박죽으로 오가던 나날이었다. 피해자가 있다면 폭도들과 경찰들 사이에서 협박과 위험에 시달린, 바다에서 밭에서 힘겹게 일해 하루하루 먹고살던 선량한 어부, 농부들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지켜줄 정부도 경찰도 없이 진퇴양난에 놓인 상황이었다. 밤이 되면 산에서 사람들이 내려와 먹을 것을 바치라면서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낮이면 경찰이 와서 폭도들과 내통하지 않았느냐고 또는 그들과 한패가 아니냐고 귀신같이 캐물으며 역시 협박을 가했다. 경찰과 군이 토벌을 개시하면서 아무 혐의도 없는데 목숨을 잃었던 무고한 사람이 수두룩하다.

무법 상태가 계속되면서 1948년 10월 17일경 계엄이 선포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어렵지만 살던 집을 두고 해변으로 친척이나 인연을 찾아서 피난을 가야 했다. 내가 태어난 지 십여 일 후에 우리는 일차적으로 토산으로 피난을 갔고 조금 있다가는 가족이 분산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토산에 남고 어머니와 우리 2남 1녀는 신흥리로 옮겼다.

얼마 후 어느 날 어머니와 할아버지는 비축해 두었던 식량을 되찾으러 살던 곳에 갔다. 어머니는 할아버지보다 먼저 하산했다. 늦은 시간까지 할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초조해졌다. 그리고 곧 할아버지가 돌아오던 중에 토벌군에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장은 손을 쓰지 못하고 며칠을 기다린 후에야 이슥한 자정에 주변 친척분의 지원을 받아서 할아버지 시신을 확인하고 가매장을 할 수 있었다. 묘지는 세상이 안정되면 새로이 만드는 것으로 했다.

다시 얼마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생사도 알 수 없던 아버지가 깊은 밤 어머니 있는 곳을 찾아왔다. 아버지가 남긴 말씀은 이랬다. “이제 세상은 어려워지고 있다. 당신도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딸은 큰이모 집에 보내고 첫째 아들은 작은이모 집에 보내라. 당신은 작은 애와 함께 여기 그대로 있어라. 애들에게는 할아버지 죽은 날을 알려주고 세상이 안정되고 나면 살아있는 사람이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도록 이르라.” 그 말씀을 남기고 아버지는 다시 떠났고 그것이 어머니가 아버지를 뵌 마지막이었다. 뜻하지 않은 유언이 된 셈이다. 당시 어머니는 그런 일은 전혀 예상을 못 하고 살아도 함께 살겠고 죽어도 함께 죽겠노라고 했다 한다.

현 회장의 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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