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칼럼] ‘조건’의 법칙 또는 ‘몫’의 법칙
[대림칼럼] ‘조건’의 법칙 또는 ‘몫’의 법칙
  • 전은주 재한동포문학연구회 부회장
  • 승인 2022.02.14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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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일 만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늘도 부모님이 격렬하게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버스 안에서 기도했던, 집안의 평화는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도대체 이 지긋지긋한 전쟁은 언제 끝나는 걸까? 자식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는 걸까? 나는 신발을 벗지도 않고 그 지겨운 싸움터에서 빠져나왔다.”

지난 학기 글쓰기 수업에서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을 주제로 어느 학생이 썼던 글 중의 한 부분이다. 그의 글은 늘 심하게 다투는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불행한 처지에 대한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학생과는 온라인 ZOOM 상담으로 피드백을 대신했다.

“그 이유를 알아보려고 노력해보았니?”
“진지하게 여쭤보고 눈물로 호소한 적도 있어요.”
“그래서 무얼 들었지?”
“어머니는 아버지가 가족들을 무시하는 걸 참을 수가 없대요! 아버지는 회사 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고 계시대요.”
“그래서 넌 어떻게 했지?”
“두 분의 처지를 다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너는 왜 화가 나고 슬퍼질까?” 
“저는 자식이잖아요. 불행한 가정에 산다는 게 너무 억울해요”
“그러니까 네 자신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거지?”
“네.”
“참 이상하구나? 부모님 사정도, 네 자신의 처지도 다 이해하는데, 왜 억울하고 슬퍼질까?” 
“네? … !”

그 학생과 한참 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뒤, 반갑게도 그 학생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문제를 스스로 발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자신의 처지를 “다 이해할 수 있다”는 그것이 ‘함정’이었다는 것이었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애가 밤이 이슥토록 자꾸 울어댔다. 젊은 부모는 아기가 우는 이유를 몰라 어르고 달랬지만 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부부는 서로한테 짜증을 내기도 하고, 화도 내면서 쩔쩔맸다. 안채에서 그 소식을 뒤늦게 들은 할머니가 달려와, 겨울이라 꽁꽁 싸맨 아기의 옷을 간편하게 갈아입히고 시원한 보리차를 먹였다. 두어 시간을 맹렬히 울던 아기는 금새 편하게 잤다. 할머니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가 보채는 이유를 ‘이해했기’ 때문에 화를 내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었다. 그 까닭의 본질을 이해했으니 금방 해결책을 찾게 되었다.

그 학생이 이해한 것은 할머니와 달랐다. 그가 깨달은 것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 ‘각자의 조건’이었다. 아버지의 조건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고, 어머니나 자식인 자신의 조건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과 부모님이 지닌 그 ‘조건’을 이해한 것이지 그들의 속사정(본질)을 이해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체로 우리가 서로 다툴 경우에는 ‘자신의 조건’을 보편타당한 것처럼 착각하고, 다른 경우의 사람들이 지닌 조건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易地思之가 진실로 어렵다.

어떤 문제에 대해 논쟁을 벌 릴 경우 자신의 조건만으로 상대를 설득하려 들고, 상대의 논리적 허점을 파헤치는 데 힘을 쓴다. 그러다 보니 오해가 생기고 분쟁이 생기고, 그것이 심해지면 상대를 비난하고 마침내 적개심마저 생겨 원수가 되어 분열하고 마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한참 대화를 나눈 결과, 그 학생은 자신이 이해한 것이 부모님을 위시한 ‘각자의 조건을 알았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다툼은 언제나 자신의 조건을 상대한테 강요하는 데서 일어났다. 자신이 이해한 것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바뀔까? 그때 비로소 그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려고 들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해결책을 어디서, 어떻게 찾을 것인가?

세상의 사소한 이견이나 좀 심각한 다툼도 모두 이런 조건의 다름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그 학생의 가정처럼 수십 년 동안 불화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소통 문제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간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러셨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는 것이 건강상 나쁘다는 것을 ‘알았지만’ 사람들과 어울리고 어찌하다 보면 또 마시고 다시 후회하고 자책했다. 때로는 술을 자제하겠다고 선언해놓고도, 몸이 좀 나아진 것 같으면 얼른 다시 마시고 싶어서 술을 들었다. 술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 왜 그러셨을까? 아버지께서도 조건만 이해했을 뿐이다. 그 당시는 그 이유를 몰랐다.

앞에서 말한 그 학생은 자신이 이해한 것이 ‘조건’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마치 자신의 문제가 다 해결된 것처럼 기뻐했다. 그리고 작별을 고하다가 머뭇거리면서 물었다.

“선생님, 제가 지금까지 잘 이해한 줄 알았는데, 전혀 몰랐던 것을 알았어요.”
“맞아! 이제 몰랐다는 것을 알았잖아! 그게 출발점이야!”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학생은 떠나갔다. 갑자기 안타까움이 몰려왔다. 저기쯤 가는 학생을 불러세워 묻고 싶었다.

“몰랐다는 것을 알았으면 왜 질문하지 않지?”

내가 그러지 않은 이유는, 그 질문을 유도하는 순간 그 학생한테서 돋아날 질문의 씨앗을 싹둑 자르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성서에도 그런 구절이 있지 않은가? “구하라! 그러면 구할 것이요.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학생 스스로가 구할 때까지, 두드릴 때까지 기다려주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선생의 비애(?)일지도 모른다.

그때 학생한테 말해주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가 깨우친 ‘조건의 차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몫의 법칙’이다. 그 학생이 집으로 돌아가 자신이 깨우친 것을 부모님께 말씀드린다고 해도, 그 부모님의 행동이 변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학생은 대화를 통해 그런 깨우침을 얻었지만. 그건 이론의 문제, 설득의 문제가 아니다. 그 학생이 찾아야 할 다음 차원의 답은 ‘몫’의 문제이다.

논리나 이론으로 상대를 설득할 수 있다면 인간의 모든 갈등이나 오해나 오류 등은 다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논리나 이론으로 상대의 인식 자체를 변화시키기는 참으로 힘들다. 가족마저도, 가장 친한 친구마저도 이해시키기 어렵다. 즉, 상대의 인식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세상에는 성서나 불경 또는 공자의 말씀 같은 아름다운 책이 널려 있어도, 그 책으로 상대를 설득시키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누군가를 설득한다면 가장 쉬운 상대가 바로 자신일 것이다. 그래서 자신부터 설득한다는 것이 바로 ‘몫의 법칙’이다.

그 학생의 경우, 아버지는 아버지의 몫이 있고, 어머니는 어머니의 몫이 있을 것이다. 즉, 그건 부모님의 몫이다. 그러나 그 학생은 자신의 몫을 찾아야 한다. 그가 자식으로서의 ‘아들의 몫’을, ‘사람의 몫’을 하기 시작한다면, 어느새 다른 가족들도 제 자리를 찾기 시작할 것이다. 모든 관계는 상호성을 띄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은, 모든 인간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변하면 저것도 변한다.

우리 각자에게는 모두 자신의 ‘몫’이 있다. 가정에서는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몫, 학교에서는 학생 또는 선생으로서의 몫, 사회에서는 사회구성원으로의 몫, 그 몫이 객관세계에서는 맡은 역할이나 위치에 따라서 다를 수는 있어도, 각자에게 주어진 몫의 크기는 똑같다.

동계올림픽 ‘한복’ 사건으로 시끌벅적하다. 도화선을 당길 때마다 불꽃처럼 터지는, ‘자신들의 조건’에 대한 주장이 또다시 작열한다. 모두가 각자 말하는 저마다의 조건에는 역사나 정치를 위시해서 혐중, 혐한의 조건이 제시된다. 그들이 내세우는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논쟁의 끝은 요원하다.

조선족은 한민족이라는 혈통 국가와 국적 국가인 중국을 사이에 둔 과계민족이다. 그들의 정체성은 어느 한 가지 조건으로 규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조선족 작가 리은실은 “한복 논란에 대한 섭섭함으로 중국 여자축구를 응원해야지 하고 TV 앞에서 앉았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 기쁜가 아닌가 떨떠름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데, 화면에 상심에 가득한 한국 선수들의 얼굴이 잡혔다. 마음 한쪽으로 밀려오는 알알한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선족은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는데 어찌 과계민족이라고 할 수 있느냐” 라는 한족과 만나면 분노하면서 한반도의 역사를 말하고, “조선족은 중국인이다”라고 말하는 한국인과 만나면 또 다시 분노하면서 조선족의 이주사를 말하기도 한다. 그렇게 조선족의 조건은 알게 모르게 한중 국가 사이에 서 있다.

이제 조선족은 조선족의 ‘몫’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언제까지 양쪽의 ‘조건’을 이해하는 차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아무리 양쪽의 조건을 다 이해한다고 해도, 우리의 몫에 대한 실천적 모색이 없다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조선족 스스로가 가장 적절한 방안을, 다양한 지식이나 양심의 길을 참고하여, 끊임없는 자기성찰로, 자신의 몫의 답을 얻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절대 생각에만 빠지지 말고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두 경계를 가로지르며 존재하는 과계민족으로서, 두 경계에서 서로 다른 이질성을 내세워 동시에 배척당하는 존재가 될 것인가, 두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조선족 스스로의 몫에 대한 인식적 자각에 달렸다.

우리의 몫이 무엇일까? 지금 바로 이 시점에, 반드시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우리가 우리의 몫을 다 하면 우리는 당당해질 것이다. 그러면 그 중심이 우리 조선족이지 더 이상 중국 또는 한국이 아닐 것이다.

재한동포문인협회 동인지 『동포문학』 9호에 실린 「윤동주가 부럽다」는 시에서 박춘혁 시인은 이렇게 읊는다.

“여기서도/ 자기 사람이라 반기고/ 저기서도 / 자기 사람이라 모시니/ 시라도 한 번 잘 쓰자/ 태어난 곳이 무슨 상관이랴/ 오늘 밤 달은 둥글다”

시인은 ‘태어난 곳’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이 규정짓는 몫에 의해, 그걸 통해 형성되는 우리 인식에 따라서 스스로의 존재와 위상이 달라짐을 노래한다. 조선족 모두가 ‘윤동주’가 되어야 한다.

조선족 각자가 자신의 몫을, 조선족으로서의 조선족의 몫을 생각하면서, 자신들 속의 특별한 ‘윤동주’를 발견해내야 할 것이다. 시인이 아니어도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의 몫을 다해내면 된다. 그때 조선족은 진정으로 경계를 가로지르며, 한중 양국에서 특별하고도 당당한 존재가 될 것이다.

필자소개
1986년 도문 량수 출생, 연변대학교 문학석사, 연세대학교 문학박사, 현재 연세대학교 시간 강사,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재한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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