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미희의 음악여행 ㉟] 돈화문 앞 국악의 거리를 걷다
[홍미희의 음악여행 ㉟] 돈화문 앞 국악의 거리를 걷다
  • 홍미희 기자
  • 승인 2022.06.27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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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선동 한갑덕 선생 집터
익선동 한갑덕 선생 집터

돈화문을 시작으로 종로3가역에 이르는 길을 ‘국악로’, ‘국악의 거리’라고 부른다. 그리고 ‘돈화문’ 맞은편에는 ‘서울 돈화문 국악당’과 ‘서울우리소리 박물관’이 있다. 이 주변에는 국립국악원의 전신이자 광복 직전까지 종묘 및 문묘 제향에 제례악을 연주했던 이왕직아악부, 지금은 국립국악고등학교가 된 최초의 국악 교육기관인 ‘국악사양성소’와 거문고 가야금 가곡 성악 등 동·서양악을 모두 다뤘던 ‘조선정악전습소’가 있었다. 그런 곳들이 정악을 연주하고 연구하는 곳이었다면 가야금 명창이자 인간문화재인 박귀희가 운영했던 ‘운당여관’, 서울 3대 요정의 하나였던 ‘오진암’ 등 민속악을 연주하는 사람들도 이 거리에는 가득했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5호 판소리고법 인간문화재인 화고(和鼓) 정화영 선생을 만나 과거 이곳에서 음악을 하고 치열하게 살았던 민속 국악인들의 흔적을 찾았다. 그들이 살던 종로 3가에는 지금은 아파트로 기관으로 변하며 그들의 영화가 보이는 집들과 조촐하고 힘들었던 삶이 보이는 작은 집들이 있었다.

“이 동네는 박귀희, 박초월, 김소희 선생님 등 국악인들이 어림잡아 100여 가구는 살았던 곳이죠.” 이같이 말한 정화영 선생은 이곳에서 50년 넘게 살고 있어 종로 국악의 산증인과 같은 분이다. 답사는 운현궁 옆 덕성여대 골목에서부터 시작됐다.

덕성여대 교육관 앞에 선 그는 “여기가 박귀희 선생님 집입니다. 옛날 문화여관 자리를 덕성여대에서 샀어요. 그 집 현관이 여기예요. 예전부터 박귀희 선생님, 박초월 선생님 집을 우리가 세배 다니고 그랬어요. 원래 여기 전체에 집이 있었죠. 저 옆의 월드타워까지였다니까요. 여관까지 하시면서 바둑대회도 하고 그랬죠.” 이 운당여관을 팔고 박귀희 선생은 국악학교를 만들었다. 현재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가 되어 국립국악중고등학교와 함께 국악 산실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1951년 구입하여 1989년까지 박귀희 선생님이 운영했던 이곳은 조훈현, 이창호, 서봉수 등의 대국을 방송국에서 직접 중계할 만큼 바둑의 성지이기도 했다. 또 영화인들이 장기투숙하면서 대본도 집필하여 영화의 산실이기도 하다. 이 건물의 일부는 철거될 때 경기도 남양주의 서울종합촬영소에 복원됐다.

정화영 선생은 바로 옆 골목의 집을 가리키며 “여기가 박초월 선생님 집이에요. 당신이 직접 지으신 집이죠. 저기 마루에서 문 열고 형님, 동생 이러며 지냈어요. 박귀희 선생님이 박초월 선생님께 형님이라고 했잖아요, 여기서 문 열고 형님 이렇게 부르곤 했어요. 박초월 선생님은 여기서 사시다 불광동 쪽으로 이사 가셔서 거기서 돌아가셨어요.” 지금은 갤러리가 되어 전시도 하고 차도 마시는 공간이 됐다.

--- 박귀희 선생 운당여관 터(왼쪽)와 박초월 선생 집터
박귀희 선생 운당여관 터(왼쪽)와 박초월 선생 집터

“여기가 원래 뼈대가 있는 동네였어요. 궁하고 관련이 있는 대감들 이런 분들이 여기 살았죠. ‘대하’도 원래 대감 집이었어요.” 맞은 편에 보이는 현대 뜨레비앙 아파트 자리가 옛날 요정으로 유명했던 ‘대하’ 자리다. “당시 종로 3가는 요정촌이었어요. 그큰 요정에는 지정으로 연주하는 팀들이 있었죠. 대하, 오진암, 청풍, 명원, 선운각, 옥류정, 청각 같은 곳이었어요. 그런데 국악 하는 사람들이 택시를 타거나 이럴 경제적인 여유가 없으니 자연적으로 걸어 다닐 수 있는 이 근처에 살았죠. 요정에 지정으로 국악팀이 있는 곳도 있었지만 그게 없는 작은 곳은 국악인을 불렀거든요. 그래서 그걸 대비해서 국악인들이 이 근처 조그만 곳에 무용, 노래, 기악 이렇게 8명 정도가 모여 있었죠.”

“그리고 그 뒤에 일본 관광객을 받으면서 요정이 더 많이 생겼어요. 그런데 요정에서는 전속으로 5명에서 7명까지 국악인을 두어야만 관광 허가가 나왔습니다. 관광 허가가 나오면 일본 관광객을 100명~200명 이렇게 수용할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당시 큰 요정에는 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방이 있었죠. 그러면 사실 200명이 들어가는 거죠. 여자 하나씩 해서. 그게 요즘은 이렇게 호텔을 짓고 변했어요.”

일제 강점기에 이왕직아악부가 생기면서 규모가 줄어 없어진 국악인들이 이쪽으로 왔는지 질문하자 “아니 그것과는 관계없습니다. 이왕직아악부는 일체 분야가 다릅니다. 정악이기 때문에 우리 민속악에서는 필요가 없는 음악이에요. 그리고 당시 정악 하는 분들은 민속악을 못 하게 했어요. 쌍놈이라고. 정악과 민속악은 지금까지도 서로 그런 게 있어요. 지금까지도, 정악은 국립국악원, 또 각 대학이 생기면서 80~90%는 정악 하는 분들이 자리 잡았죠. 그런데 민속악은 불과 10% 정도예요. 하지만 국민들이 정악을 보나요? 거의 민속악을 부르고 보는데 사실 정악 들으면 졸지요. 나도 지금도 정악만 하면 오래 못 버텨요.”

현대 뜨레비앙아파트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때 지나가던 사람이 인사를 한다. 나오셨어요? 돌아보면 다 아는 사람이다. “정철호 선생님이라고 무형문화재 판소리 고법5호인데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여기서 세를 사셨어요.” 그렇게 오래 사셨는데도 전세를 사셨네 하자 “끝까지 사글세를 사셨지.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며 사셨는데 마지막 집이 여기예요.” 하얀 벽을 가진 집에서 방 하나 세를 사셨다.

요정 대하터(현대 뜨레비앙아파트)

“여기가 대하 정문이에요. 여기 전체가 다 대하였죠. 현대뜨레비앙아파트 정문 자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요. 옛날 사진은 없지만, 대문을 아주 크게 만들어서 여러 사람이 사진을 찍어갔어요. 재벌들이나 부잣집 사람들이 여기처럼 대문을 한다고. 제가 총각 때 여기서 7~8년 양아들로 있었어요. 이 골목골목 방 하나하나에 기생들이 바글바글하게 살았어요. 여기에서 50년을 넘게 살았으니 모르는 곳이 없어요. 저기 모퉁이 저 집 평수 까지 다 아는데.” 민속악에서 요정이 끼친 영향은 생각보다 깊고 어쩌면 크다.

“이제 청풍으로 갑시다. 지금은 동사무소가 들어있어요. 종로 1,2,3,4 동사무소” 조금 걸어가는 길목 여기저기에도 조그만 국악사, 무용소품을 파는 곳들이 있다.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국악사도 다 여기로 몰렸죠, 외국에서도 여기로 다 와요.” “외국에서 국악기를 살 일이 있나요?” “거기서도 국악을 가르치고 배우고 그런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럼 한국에 나오는 길에 사고 그러더라구. 장구도 사고 뭐” 옆에는 경기민요전수관이 있다. 청풍자리에 만들어진 동사무소에는 우리소리 도서관도 들어있다.

종로 주민센터(요정 청풍 터)
종로 주민센터(요정 청풍 터)

“나는 제일 아까운 게 오진암을 보존했어야 해요, 그 멋있는 한옥을. 역사가 있는 집이거든, 소중한 자료죠.” 이제 이비스호텔이 된 건물의 벽에는 사진으로 당시의 역사가 보존되어 있다. 역시 서울이라 경기민요가 많다. “이후락이 여기서 파티했어요. 이건 7.4 공동성명한 파티장면이고.” 옆에는 조그만 정자가 보인다. “그 정자는 옛날 거 아녜요.” 현관의 자리는 대하와 마찬가지로 옛날의 현관과 똑같은 자리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바로 옆을 가리키며 “저기가 자유당 때 사형당한 임화수, 그리고 97세로 작년에 돌아가신 경기민요 이은주 선생님 집도 여기였어요. 여기가 명월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명월관인지 묻자 “사람들이 그냥 명월관이라고 하는데 명월이지” 한다.

이비스 에베서더 인사동(오진암 간판, 왼쪽)과 종로 오피스텔(요정 명월 터)
이비스 에베서더 인사동(오진암 간판, 왼쪽)과 종로 오피스텔(요정 명월 터)

이제 발을 돌려 요즘 ‘핫’ 해진 익선동 쪽으로 간다. “여기는 방들이 싸니까 사람들이 참 많이 살았어요. 저도 여기서 세 많이 살았어요. 밥을 굶은 적이 있는데 뭐. 서대문 영천도 걸어 다녔지. 사연이 참 많지요. 그런 동네가 이렇게 변했어요.” 이제 익선동에는 어깨 부딪히면서 걸을 만큼 사람들이 많다.

“이 집이 거문고 문화재였던 한갑덕 선생님 집입니다.”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기왓장 아래로 깨끗하게 수리한 조촐한 집이 보인다. “여긴 김영수 고법 문화재이고. 여기 2층에 살았어요. 문은 저쪽이고. 제가 지금 문화재만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거예요.” 많은 국악인들이 여기저기 몰려다니며 소리를 하고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도 대화를 나누던 풍경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여긴 김덕수 선생 집, 우리가 돌아가실 때까지 김득수라고 불렀죠. 진도분이었어요.”

이제 돈화문 쪽으로 쭉 뻗어 나간 길에 들어섰다. 돈화문에서 종로3가까지의 길이 국악로다. 그 중간에 있는 건물 앞에 섰다. “여기가 김소희 선생님 학원하던 자리예요. 집은 원서동에 있었지만, 학원은 여기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1층 횟집의 간판에는 수궁가의 한 구절이 써 있다. ‘범피중류 둥덩둥덩 떠나간다. 망망한 창해이며 탕탕한 물결이로구나.’

나마갤러리(박소희 선생 학원 터)

“저기 빨간 벽돌로 리모델링한 건물이 우리 국악과 관계 깊은 건물입니다. 정광수, 김소희선생님 모두 다 여기서 학원을 했어요. 3층은 이생강, 4층은 김소희 선생, 5층은 남해송 선생 저도 여기서 했어요. 그리고 건물의 뒤로 돌아가면 뒷방 쪽에 정화수 선생, 모든 거물급들이 다 여기서 학원을 했어요. 그래서 이 건물은 국악에서 꼭 기억해야 할 건물입니다.” 여기서도 한 젊은 사람이 다가와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한다. “요즘 눈을 다쳤다면서? 한잔해야지. 다음 주에 유언주를 마시자고.” 스스럼없이 농담하는 선생에게서 오래된 동네 터줏대감의 여유가 보인다.

길을 걷다 보이는 오래되고 낡은 간판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먼지 가득한 간판과 때가 낀 유리창은 영락의 세월을 거듭한 시간을 보여준다. 세월의 흔적 속에 숨어 있을 법한 많은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곳. 이곳은 종로 3가다.

 

A: 박귀희 선생님, 현 덕성여대 교육관
B: 요정 대하: 현대뜨레비앙 아파트
C: 요정 청풍“ 종로 1,2,3,4가 주민센터
D; 요정 명월: 이비스 엠베서더 호텔 인사동
E; 한갑덕, 김영수, 김덕수: 익선동 한옥거리
F: 김소희선생 학원: 나마 갤러리
G: 돈화문, 서울 돈화문 국악당, 서울 우리소리 갤러리, 국악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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