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성 칼럼] 조선의 문학을 위하여… 오무라 마스오 교수를 추모하며
[정대성 칼럼] 조선의 문학을 위하여… 오무라 마스오 교수를 추모하며
  • 정대성 문화칼럼니스트
  • 승인 2023.01.24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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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곡 ‘회상’ 노랫말처럼 필자의 심정은 이렇다. “때로는 눈물을 흘릴 것도 같네, 이제는 혼자라고 느낄 때. 보고 싶은 마음 한이 없지만, 찢어진 사진 한 장 남질 않았네. 그때는 너무나 어렸었기에, 그대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네.”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 마지막 장면처럼 빨리 되감기로 떠오르는 청춘의 기억. 그러나 실연의 미련 따윈 아니다. 필자의 은사, 대학 때 지도교수셨던 오무라 마스오 명예교수가 타계했다. 고인은 ‘고급 조선어’ 과목 담당이셨다. 수업은 연구실에서 원서 강독, 번역 연습(演習)으로만 진행했다. 훗날 출판한 이기영의 ‘고향’, 현대한국의 현실참여 소설 등의 번역 지도를 받았다.

매번 출석하는 학생이 2, 3명 정도였다. 필자 혼자만 출석한 날이나 학기 말이면 오쿠마 강당 옆 교수 식당이나 대한항공 승무원 출신 주방장이 있는 마마하우스에서 점심을 사주시곤 했다. 필자는 졸업 후에 자원봉사 연구원처럼 연구실 출입을 허락받았다. 진국 같은 짧은 말씀과 늘 짓고 계시는 미소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고인의 대화법은 공자 같고, 풍모는 노자 같았다. 정치 문제를 물어보면 “추하다”라고만 하시고, 관념적 질문을 하면 그냥 침묵하셨다. 와세다의 자유로운 공기 속을 “서로 말 없이 걷기도 했지만, 좋은 기억이었어.”

15일에 지병으로 돌아가셨다는 내용이 19일 자 ‘아사히신문’ 부고란에 실렸다. 20일에는 한국의 언론 매체들에도 업적을 기리는 기사들이 다양하게 나왔다. 페친들 글에 “돌아가셨단다”라고만 돼 있어 설마했는데, 필자에게 ‘중급 조선어’를 가르쳐주신 츠루조노 유타카 교수의 페북 글을 통해 ‘아사히’에 부고가 실렸다는 걸 알았다.

오무라 마스오 교수와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
오무라 마스오 교수와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

와세다대 객원교수도 지내신 김응교 교수님이 20일 자 ‘한겨레신문’에 올리신 글 ‘한국에 윤동주 가치 알려준 ‘거대한 아시아인’이 제일 상세한 듯하다. 임전혜 씨, 심원섭 교수, 호테이 토시히로 교수, 필자의 페친 분들, 젊은 신진 연구자들 등 내로라하는 ‘오무라 학파’가 이루어졌는데, 그중에서도 김응교 교수님은 훌륭하신 애제자였다.

당시 연구실에는 교수님이 번역하신 책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중국 고전 ‘열자’도 있지 않았나 싶다. 교수님은 조선문학 연구자가 되시기 전에는 중국학을 하셨다. 그 연장선상에서 접하게 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매력이 고인을 조선문학 연구로 향하게 한 하나의 요인이었다. 필자의 한문 고전 연구도 그런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고인의 원래 연구 주제는 중국 계몽지식인 양계초였다. 양계초는 메이지 일본의 자유민권운동가 토카이 산시의 정치소설을 번역하다가 중단했다. 토카이가 조선을 일본 고유의 영역으로 생각한다는 대목에서, 조선을 중국 고유의 영역으로 생각했던 양계초와 의견이 갈렸기 때문이다. 토카이나 양계초 둘 다 조선의 주체성에 관해 망각하고 있었다.

근대 이래 “탈아입구” 한 일본이 스스로 제국주의화하여 조선을 패망시키고 병탄했다. 이런 역사 속에서 세계를 ‘문명, 반(半)야만, 미개야만’으로 3분 해, 중국, 조선을 ‘반야만’으로 치부했다. 이런 제국주의 사관에 항거해 중국문명은 재평가받고 있지만, 조선은 방치돼있었다. 이런 문제의식이 고인에게 있었던 걸로 안다.

번역하신 책들 중에 서울대 김윤식 교수의 ‘상흔과 극복’, 재야사학자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이 있었다. 두 책의 공통분모가 ‘춘원 이광수’였다. 필자가 춘원 연구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도 거기에 있었다. 당시 중국 조선족 작가들의 단편 소설집인 ‘시카고 복만이’도 번역, 출간하셨다.

그 무렵, 방문교수로 연변대학 조선문학과의 김호웅 교수님이 오셨고, 중국조선족 문학 목록을 작성하는 것을 필자가 도와드린 적도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김학철 같은 작가의 존재도 알게 되었다. 졸업 후, 연변으로 간 필자를 맞아주신 김호웅 교수는 자기 집에 필자를 초대했고, 윤동주 묘도 찾아볼 것을 권했다.

고인은 연변 용정에서 윤동주 묘를 자유진영 문학자 중 최초로 주목하고 해마다 참배하셨다. 일찍 일본, 미국과 중국이 수교한 데 비해, 한국만 수교가 늦어서 한국인들은 방중하지 못했다. 윤동주의 유족이 고인에게 묘를 찾아달라고 부탁드렸다. 윤동주가 일제 경찰에 의해 죽었던 것에 대한 속죄의식도 있었던 듯했고, 고인은 윤동주 시도 높이 평가하셨다.

참된 속죄는 말로 할 수 없다. 연구라는 행위 자체가 속죄였으리라. 아니면 반권력에의 의지로서의 힘에의 의지였을까? 블랙홀 같은 침묵의 무게…. 사무사(思無邪)! 한마디로 말하면 이것이 고인의 이미지다. 연세대 국문과에서 연 발표회에서 교수들이 고인에게 어려운 질문을 던지셨을 때도 침묵을 지키시던 걸 본 적이 있다.

시인 김용제 연구의 책 제목이 ‘사랑하는 대륙이여’였다. 식민지 시기 사회주의자이자 변절한 친일파로 낙인이 찍힌 김용제는 남북한으로부터 동시에 외면당했다. 그가 조국에 보낸 짝사랑을 안타까워한 고인 또한 일본사회나 남북한으로부터 외면당했다. 고인의 조선문학에 쏟는 사랑은 김용제의 그것과 겹쳐진 것은 아니었을까?

1973년에 처음 방한한 고인은 “나의 조국이라곤 말할 수 없지만, 사랑하는 대지”라고 밝히셨단다. 일본의 보수파가 말하면 오해받을 표현이지만, 고인의 말씀이기에 이해되는 것이다.

필자는 졸업논문 주제로 김사량을 선택했다. 필자는 당시 평양에서 출판된 ‘김사량 전집’을 입수했다. 그 조선어 텍스트가 어떻게 일본어 텍스트와 바뀌어있는지 대비시키면서 북한 편집자의 변개 흔적을 추적하여 그 의도를 추측하는 리포트 수준의 논문을 조선어로 써서 심사 통과를 했다. 리포트 수준이긴 하나, 필자 나름대로 뜻을 담아 조선어로 썼다.

필자가 동경대 대학원에서 조선실학을 공부할 때나, 메이지대 대학원에 진학하여 춘원 이광수를 연구할 때 앞서서 꼭 추천서를 마다하지 않고 써주셨기에 그것들이 가능했다. 당시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사라져가는 시기였지만, 필자가 방을 구하다 집주인한테서 조선인이란 이유로 입주 거부를 당한 일이 있었을 때, 고인은 항의 전화를 직접 걸어주시고 필자가 입주할 수 있게 도와주시기도 했다.

1992년에 고인이 고려대 교환교수로 오신 걸 이번에 김응교 교수님 글로 새삼스레 기억해냈다. 그때쯤에 필자는 고려대 시간강사를 나가다가 아무런 연고나 밑 작업 등 없이 경희대 전임강사로 부임할 수 있었다. 혹시 암묵의 은사님 음덕이나 후광이셨을지도 모른다.

근데, 필자는 그때쯤 딸이 태어나, 육아에 몰두하거나 살기에 바빠서 교수님을 거의 뵙지 못했던 것이 정말 아쉽다. 말하자면, 필자는 춘원을 객관화한 연구를 전개하는 것과 같은 차분한 연구자가 되지 못했다. 춘원의 고뇌를 몸소 체험하기 위해, 또 필자 자신의 문예 창작을 위해, 험한 세상 밑바닥으로 내려와 버린 것이다.

고인의 업적 중 대표 격이 이와나미 문고에 ‘조선단편소설선’ 상하권을 넣은 일이다. 조선문학을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업적이라고 할만하다. 사에구사 토시카츠 교수, 쵸 쇼키치 교수라는 동경외국어대학 교수 두 분과 함께 공역으로 내신 책이었다. 책에는 일본 식민지 시기의 유명 작품들이 망라돼있다. 쵸 교수는 일찍이 돌아가셨고, 필자는 고인의 소개로(?) 사에구사 교수를 동경외대 연구실에서 개인적으로 뵈었던 적이 있다.

그때 사에구사 교수는 “문학이란 것은 재미있으면 그만인데, 조선문학이 진짜 그리 재밌냐? 연구할 값어치가 있을 정도로?” “조선문학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과거사의 부채의식이나 진보사관 등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조선문학 연구는 마치 시체 해부와 비슷한데, 그런 일을 견뎌낼 수 있는가?”라는 뜻의 도발적 말씀을 하신 것으로 기억한다.

오무라 교수는 친구이신 사에구사 교수나 고 타나카 아키라 씨 등과 성격도 대조적이었지만, 연구 태도 또한 대조적이었다. 문학을 전인적, 사회과학적으로 이해했다. 고인은 한국어, 한반도 등이 아니라, 반드시 조선어, 조선반도 등의 표현을 쓰셨다. 그것은 한반도에서의 유일 정부라고 주장하던 군사독재 정부를 유일정부로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당시 진보파의 태도와 관련된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인이 무슨 정치적 견해를 보인 것은 절대 아니다. 1974년 독재에 맞서 민주화투쟁을 하다가 난처해진 한국 문인들을 석방하기 위해 구명운동을 하신 것처럼,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다녀온 김응교 교수를 1998년 와세다대학에 객원교수로 초빙한 것처럼, 약자에 대해 늘  따스한 손길을 펼친 분이셨다. 조총련 교수들이 부르주아 사관이라 비판한 김윤식 교수, 4월 혁명 때의 밀항자 출신인 윤학준 교수, 조총련계 조선대학교의 김학렬 교수, 위의 사에구사 교수, 타나카 씨 등과 동시에 친구가 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분이셨으리라.

일본의 전중파(戰中派) 세대들은 1945년의 패전체험 같은 신념 붕괴 경험을 거쳤고, 전후민주주의 분위기 속에서 좌경화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찍이 북조선, 중국, 일본의 인민적 연대운동까지도 했던 좌파들은 안보반대, 전공투 같은 학생운동으로도 이어졌다. 그런 시대였기에, 재일조선인 여성을 배필로 맞이하셨던 것도 그런 흐름에서였으리라.

필자의 와세다대 동창의 모친과 고인의 사모님은 학창시절부터 절친이셨던 걸로 안다. 남편의 죽음 앞에 지금 엄청난 실의에 빠지셨다고 들었다. 마침 일본행 비행기를 타던 김응교 교수님께 부탁해 유족들에게 위로의 인사를 전해달라고 했다.

시대가 흐르면서 조일국교정상화 움직임도 있었다. 1991년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도 이루어졌다. 2002년, 2004년 조일회담도 이뤄졌다. 하지만 북한이 일본인 납북을 인정하는 바람에 대화가 깨졌다. 이로 인해 일본사회당 등 진보파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고인은 1980년대에 북한을 방문한 황석영, 고은 등에 관해서 약간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윤동주라는 공통항을 지닌 고은에 대해서도, 그 시를 인정하면서도 그 과장되게 자신만만한 태도나 낭독 퍼포먼스에 대해선 질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신 것을 본 기억이 있다. 문학을 정치에 이용하는 것에는 반대 입장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오랜 반공 군사독재 하에 놓였던 한국에서 고인에 대한 인지도는 낮았다. 또 괜한 오해를 사 그 업적이 인정받지 못했을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한국에서 그 업적들이 6권의 ‘오무라 마스오 저작집’(소명출판, 2016~1018)으로도 출간되고, 여러 명예로운 상들도 받았다. 그 서평, 한국문학의 동아시아적 재구성의 평가에 관해서는 장문석 ‘조선문학을 권함’(‘한국학연구’54,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9)을 참조하시라.

최근 뉴스에 의하면, 한국어가 중국어를 제치고 학습 인구수 세계 7위에 올랐다고 한다. 그동안 안 팔리는 조선어 문학을 붙잡고 분투해오신 고인은 말년에 그 추세를 알았을 터이니, 한류 드라마나 영화, K-pop 등에 의한 한국어 학습 붐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학습자는 많아졌지만, “참된 조선문화가 잊혀 있긴 마찬가지다”라고 쓴소리 한 마디만 툭 던지셨을까?

중요한 것은 일본인들이나 우리 한국인들이 고인으로부터 무엇을 배우느냐다. 고인의 삶에 관통된 연구혼, 그 본질을 이해하고 배워야 한단 뜻이다. 그것은 조선문학이라는 명칭에 상징되듯, 시간적으로는 전근대와 근현대, 전전-전중과 전후, 공간적으로는 동북중국, 백두에서 한라, 현해탄, 일본열도까지, 종횡으로 넘나드는 하나의 조선, 그 문학이 어떻게 가능한가이다.

다방면에 걸친 고인의 업적들은 그 주제에 수렴돼 승화된 것이다. 일본인과 한국인의 입장이 다를 순 있어도, 같은 인간으로서의 우의적 연대로써 그 뜻은 두루 계승될 것이다.

문학은 단순한 오락물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의 결정체로서 우리 자화상 얼굴이자 마법의 거울이다. 한국도 일본도 삶의 목적을 잃고 얼빠진 일상에 매몰된 사람들이 많다. 두 나라 다 국가적 위기가 언제 닥칠지 몰라 새롭고 커다란 월경적 비전이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서로 고인의 정신을 잘 기리며 유대를 굳건히 다져갈 필요가 있으리라.

필자도 고인의 제자로서 지금도 조선어 문예창작을 계속 시도하고 있다. 안 팔릴 책들이 되겠지만 꾸준히 자비출판의 밑천을 마련하고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필자 자신의 저작집과 북한 문학까지 망라한 ‘조선문학선’을 펴낼 것을 다시금 다짐한다. 고인의 유지를 이어받아, 중국도 일본도 아닌 ‘사랑하는 대륙’ 조선의 문학, 그 되찾기의 시작을 위하여…

정대성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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