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철 전 네덜란드한인회장, “박연의 한국 연고지 찾아요”
손성철 전 네덜란드한인회장, “박연의 한국 연고지 찾아요”
  • 암스테르담=이종환 기자    
  • 승인 2023.03.23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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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잔세스칸스 풍차마을 동행… 대항해시대 동인도회사 뒷받침해
손성철 전 네덜란드한인회장

(암스테르담=월드코리안신문) 이종환 기자    

스키폴국제공항에서 자동차로 30여 분을 달리자, 풍차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암스테르담 근교에 있는 잔세스칸스 풍차마을이었다. 초입의 들판에는 풀을 뜯는 양 떼들도 보였다.

“저 풍차 건물은 목재 제재소입니다. 앞에 목재들이 쌓인 게 보이지요. 유일하게 지금도 제재소로 가동되고 있어요.”

손성철 전 네덜란드한인회장이 소개를 했다. 제제소 앞의 풍차는 물감을 만드는 공장이라고 했다. 지금도 가동되고 있으며, 물감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관광객들도 참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잔세스칸스 풍차마을을 방문한 것은 3월 21일 오후 6시가 가까워서였다. 유럽한인총연합회 총회에 참여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암스테르담의 스키폴 공항을 경유했다. 네덜란드항공을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암스테르담 도착은 그날 오후 3시경이었으나, 브로츠와프 공항에서 출발 편이 두 시간 늦어졌다. 이 때문에 풍차마을을 둘러보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같은 비행기를 탄 손성철 회장의 사모께서 승용차를 몰고 마중을 나오는 바람에 곧바로 풍차마을로 달렸다.

“네덜란드는 풍차를 사용해 방직산업을 발전시켰어요. 영국에서 생산된 양모들이 네덜란드로 수입돼 방직물로 바뀌어 해외 각국으로 다시 수출돼 나갔습니다. 당시 대양을 항해하던 무역선 70% 이상이 네덜란드에서 제작됐습니다. 이 풍차마을은 제재소와 조선소가 밀집한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손 회장이 풍차마을을 안내하며 네덜란드의 화려했던 시절을 소개했다. 네덜란드는 이 같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주식회사와 증권거래소까지 만들면서 현대 자본주의 체제가 기틀을 잡는데 기여했다. 당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지금으로 보자면, 삼성과 아마존, 구글을 합쳐놓은 것보다 더 큰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개혁군주 피터 대제도 왕자시설 여기의 풍차마을로 와서 제재와 조선기술을 배워갑니다. 푸틴이 가장 존경하는 왕으로, 러시아에서는 광개토대왕에다 세종대왕을 합친 것 같은 인물입니다.”

피터 대제는 네덜란드에서 배운 조선술로 발트함대를 창설해 당시 강국인 스웨덴을 누르고 러시아 영토확장의 기회를 마련했다. 러시아 영토가 몽골 북쪽까지 이른 것도 피터 대제 때다.

“하멜표류기에 나오는 하멜 일행이 전남 강진의 병영으로 이송돼 머물렀잖아요. 병영 남 씨가 이들 후손이라는 설이 있고, 휴전협정 때 북한군 참모장으로 서명한 남일이 병영 남 씨라는 얘기도 있어요.”

손 회장이 하멜표류기로 화제를 돌렸다. 하멜표류기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해 돌아가기까지의 행적을 적은 기록이다. 효종실록은 1963년 당시 하멜 일행이 제주에 표류했을 때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 1594-1665)이 올리기를,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현감 권극중(權克中, 1585~1659)과 판관 노정(盧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 안에는 약재 사슴 가죽 따위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木香) 94포, 용뇌(龍腦) 4항(缸), 사슴 가죽 27,000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챤[吉利是段]인가?’ 하니, 다들 ‘야야’(耶耶)하였고…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郞可朔其)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서울로 올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전에 온 남만인(南蠻人) 박연(朴燕)이라는 자가 보고 ‘과연 만인(蠻人)이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금려(禁旅)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

하멜 일행은 13년 후 탈출에 성공해 나가사키를 거쳐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하멜은 귀국 후 동인도회사에 13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했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써서 낸 게 <하멜표류기>다.

하지만 조선에 항의도 들어왔다. 현종 7년(1666년) 때 일본 측이 따져온 내용을 동래부사 안진이 조정에 알린 내용이 현종실록에 실려있다.

동래부사 안진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왜국 사신 귤성진 등이 역관들에게 말하기를 ‘10여 년 전 아란타 사람이 물화를 싣고 표류하여 탐라에 닿았는데, 탐라인이 그 물건을 전부 빼앗고 그 사람들을 전라도에 흩어놓았다. 그 가운데 8명이 금년 여름에 배를 타고 도망 와서 에도에 정박했다. 에도에서는 그 내용을 자세히 알고자 하여 서찰을 예조에 보낸다. 아란타는 일본의 속군으로 공물을 가지고 오던 길이었다. 그런데 조선에서 물화를 빼앗고 그 사람들을 억류했으니 과연 성실하고 ‘미더운 도리인가’ 하기에 조정에서 논의하기를 “이른바 아란타 사람이란 몇 년 전에 표류해온 남만인을 말하는 듯한데, 이들의 복색이 왜인과 같지 않고 말도 통하지 않았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었으니 무슨 근거로 일본으로 들여보내겠는가, 당초 파손된 배와 물건을 표류해온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였으므로 우리에게는 잘못이 없고, 숨길 일도 없다. 왜국 사신이 오면 표류해온 실상을 그대로 말하면 되겠습니다” 하니, 주상이 이를 따랐다.

하멜 일행의 표류보다 먼저 표류해온 네덜란드 사람이 박연이었다. 박연의 본명은 벨테브레로 하멜보다는 30세 이상 나이가 많았다. 조선에서는 표류해온 박연을 귀국시키려 했으나 중국이 당시 명나라와 청나라 교체기로 혼란스러웠고, 일본은 그가 크리스찬이라는 이유로 받기를 거부해 조선에 머물게 했다.

박연은 병자호란 때 표류한 2명과 함께 참전했고, 표류한 하멜 일행의 통역을 맡기도 했다. 박연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군이 들고 온 홍이포를 조선에서 복제하는 일도 맡았다. 홍이포는 네덜란드에서 제조된 철대포를 말한다.

“박연은 조선에서 결혼해 부인과 아들을 두었다고 합니다. 원산 박 씨가 박연의 후손이라고도 하는데 아직 연결이 되지 않고 있어요. 박연의 네덜란드 고향에서는 박연재단이 설립됐고, 박연 동상도 서 있습니다. 동상은 조선 시대 무장의 옷을 입고 있어요.”

손 회장은 이렇게 소개하며, “박연의 고향 도시와 한국의 연고지를 연결시키려고 하는데, 훈련도감에 근무했다는 얘기 말고는 다른 기록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와는 달리 하멜이 태어난 도시는 전남 강진군과 자매결연을 맺고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고 손 회장은 말했다.

손성철 회장은 2005년 6월부터 2007년 5월까지 네덜란드한인회장을 지냈으며, 유럽한인총연합회에서 현재 감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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