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89] 최서면-가나야마의 한일우정
[유주열의 동북아談說-89] 최서면-가나야마의 한일우정
  •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3.07.04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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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어느 모임에서 지인이 말을 건네왔다. “서울 인근에 한일 두 나라 대사가 나란히 잠들어 있는데 가보겠느냐”고. 한국대사가 한국 땅에 묻힌 것은 당연하지만 일본대사도? 지인은 더이상 이야기 않고 같이 가보면 알게 된다면서 동행을 권유했으나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지난 5월 국제한국연구원의 최서면 원장의 3주기 추도식에 참석하고 그가 묻힌 파주시 조리읍의 하늘묘원을 찾았다. 최 원장의 묘소 옆에 가나야마 전 주한일본대사의 묘소도 보였다. 지인이 말한 두 분의 대사는 임명받은 적이 없는 백의대사 최 원장과 가나야마 대사였다.

근현대 굴곡진 한일관계에 있어서 최서면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한일외교 막후의 괴물’, ‘한일의 파이프’ 등 많은 별명을 가진 그는 1928년 음력 4월 강원도 원주에서 2남 2녀의 막내 최중하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한 달여 만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그는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6촌 형 최규하 대통령의 집에서 원주 보통학교에 다녔고 1945년 해방되던 해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다.

2020년 나남출판사가 출간한 '최서면에게 듣다'
2020년 나남출판사가 출간한 '최서면에게 듣다'

최중하는 혼란스러운 해방정국에서 한독당 산하 대한 학생연맹위원장이 되어 김구 선생을 도왔다. 1947년 장덕수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수로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49년 재심청구를 통해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그의 석방을 도운 이시영 당시 부통령은 열심히 공부하라는 의미로 ‘서면(書勉)’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옥중에서 천주교로 귀의한 최서면은 부산에서 6.25 전쟁 고아들 100여 명을 돌보는 ‘성(聖) 방지거(方濟各, 프란치스코) 집’을 운영하였다. 그 인연으로 노기남 대주교의 부름으로 천주교 총무원 사무국장이 되어 사무총장 장면 박사를 도왔다. 후에 자유당 이승만 대통령의 정적이 된 장면 부통령과 관련 체포위기에 빠지자 1957년 천주교 성직자로 변장, 미군 군용기를 얻어타고 일본으로 밀항했다.

최서면의 밀항목적은 이탈리아 로마로 가서 그의 이름대로 신학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가 로마행을 기다리는 사이 소일삼아 찾아간 일본의회도서관과 외무성 외교사료관 등의 방대한 자료를 보고 일본인보다 한국을 더 모르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는 로마행을 포기하고 본격적인 한일관계에 대해 연구하게 됐다.

1969년 최서면은 일본 게이오대학의 설립자 후쿠자와 유키치 딸의 도움으로 그의 사저에서 <도쿄한국연구원>을 개설했다. 그는 동 연구원을 통해 안중근 의사의 옥중자서전 <안응칠의 력사> 필사본을 최초로 발견, 공개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 지방의 의병활약상을 기록한 <북관대첩비>를 발견, 국내로 반환되도록 주선했다. 최서면 원장은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부당성을 지적하기 위해 동아시아의 고지도를 수집하고 수많은 관련 자료를 발굴, 소개했다.

안응칠 역사와 북관대첩비
안응칠 역사와 북관대첩비

한편으로 최 원장은 김구 장면 박정희 김대중 등 당대의 한국 지도자들과 교분을 가졌고 일본에서는 기시 노부스케, 후쿠다 다케오 등 정계 거물들과도 깊이 교류했다. 일본에서는 최 원장을 통하지 않고서는 한국과의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막후 실세였다.

최 원장은 30년간 일본 체류를 끝내고 1988년 영구귀국하여 서울에서 <국제한국연구원>을 개설·운영하면서 한일관계 발전을 위해 선구자적 사상가(thought leader)로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후배들에게 ‘일본과 화(和)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신숙주의 유언과 ‘친일파는 많을수록 좋다’는 김구 선생의 말씀을 잊지 말 것을 당부했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후 기무라 시로시치 초대 대사에 이어 1968년 7월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가 2대 대사로 부임했다. 가나야마 대사가 재임한 3년 7개월간은 한국산업화 초기 단계로 그가 한일관계 발전을 위해 기여한 공로는 적지 않다. 당시 첨단과학 제철산업은 지금의 반도체처럼 선진국이 후진국에 쉽게 기술을 전수하는 산업이 아니었다. 한국의 제철산업은 포철의 박태준 회장이 주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는 가나야마 대사의 보이지 않는 조력이 있었다.

가내야마 마사히데 제2대 주한일본대사[사진=위키피디아]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쌀’과 같은 제철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 외에는 기술을 전수받을 나라가 없다고 판단했다. 어느 날 박 대통령은 “술이나 한잔하자”라고 하면서 가나야마 대사를 청와대로 불렀다. 갑자기 호출당한 대사에게 대통령은 대뜸 “당신 누구요?”하고 물었다. 영문을 모르는 대사는 엉겁결에 “일본국 주한 특명전권대사입니다.” 녹음기에서 흘러나온 듯 대답했다. 박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거꾸로는 안 되겠소. 대한민국의 주일본국 특명전권대사로.” 박 대통령은 대사에게 사토 에이사쿠 총리에게 보내는 친서를 건네주었다.

가나야마 대사는 순간 박 대통령 눈빛에서 조국의 근대화를 위한 지도자의 애절한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 두말없이 친서를 가슴에 품고 나왔다. 그는 조용히 귀국, 외무성에도 알리지도 않고 사토 총리를 만나 친서를 내밀었다.

한국에 제철소를 만들기 위해 일본 측의 기술협력을 요청하는 친서를 읽은 사토 총리는 “그 문제는 안 된다고 했는데…” 혼잣말을 했다. 가나야마 대사는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박 대통령이 친서에 답이 없으면 한국에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가나야마 대사도 무례한 말인지 알지만, 기술협력이 없으면 한일관계는 없다고 박 대통령의 최후통첩까지 전달했다.

포항제철

그날 밤 박 대통령의 결단이 심각함을 감지한 사토 총리는 게이단렌(經團連)을 맡고 있는 신일철(新日鐵) 이나야마 요시히로 회장을 불렀다. 이나야마 회장이 “나사도 제대로 못 만들면서 무슨 제철소야”라고 역정을 내자 가나야마 대사는 “1890년대 우리가 처음으로 야하타 제철소를 만들 때도 서양사람들이 똑같은 소리를 했다”고 상기시켰다.

가나야마 대사는 훗날 고대 한반도 가야의 제철기술이 일본으로 건너가 오늘의 일본을 만든 은혜의 보답으로 제철기술 전수는 당연했다고 회고했다. 결국, 박 대통령의 애국심과 그의 ‘특명전권대사’였던 가나야마의 배짱과 기백이 오늘날 포철이 있게 했다는 평가도 있다.

가나야마 대사는 1909년 도쿄의 세타가야에서 태어났다. 그의 타고난 박애주의적 세계관으로 도쿄제국대학 정치학과 재학 중 천주교로 귀의했다. 1934년 외무성에 입부, 주로 프랑스 및 스위스 등 유럽지역에 근무했다. 1942년 로마(바티칸) 교황청과 수교한 일본의 초대 대사 하라타 켄과 함께 로마 교황청 대사관으로 부임했다. 일본 외무성에서 천주교를 믿는 가나야마 참사관을 적임자로 발탁했는지 모른다.

로마 교황청이 하와이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영미의 적대국이 된 일본과 수교하여 서방 국가들로부터 반발을 샀다. 전세가 불리한 일본은 1945년 봄 교황 비오 12세에게 미일 간 휴전의 중재(Papal mediation)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1945년 8월 일본이 무조건 항복으로 하라타 대사는 본국에 소환되고 가나야마는 대사 대리로서 1952년까지 교황청 대사관에 근무했다. 그는 귀국 후 외무성의 유럽 대양주 국장으로 보임되어 일본인의 전범 문제와 평화 재건에 진력했다. 그 후 가나야마는 주뉴욕총영사, 주칠레대사를 역임하고 주폴란드대사 근무 3개월 만에 잘 알지도 못하는 주한국대사로 발령받았다.

가나야마 대사는 주한대사를 마지막으로 1972년 63세로 퇴직하자 외무성에서는 12명의 자녀를 가진 가나야마 대사에게 외무성의 고위직을 제안했다. 가나야마 대사는 오랜 외교관 생활과 주한대사의 경험에서 한일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일본에서는 미영소중과 외교를 잘하면 성공으로 알지만, 이들 강대국과 외교를 아무리 잘해도 한국과의 관계가 나쁘면 일본 외교는 실패’라고 주장해 왔다. 가나야마 대사는 자신의 제2의 인생은 한일친선을 위해 노력할 것을 결심하고 외무성의 제안을 거절했다.

파주 하늘묘원에 있는 최서면 원장(왼쪽)과 가나야마 대사 묘소
파주 하늘묘원에 있는 최서면 원장(왼쪽)과 가나야마 대사 묘소

1972년 11월 가나야마 대사는 도쿄의 최서면 원장을 찾았다. 천주교 신자인 두 사람의 세례명이 우연히도 로마 시대의 신학자 성 아우구스티노였다. 최서면 원장은 자신의 연구원 한쪽에 대사를 위해 ‘국제관계연구소’를 만들어 맡겼다. 20년 가까운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친구처럼 형제처럼 의기투합했다. 1975년 4월 최 원장 모친의 3주기가 다가왔다. 가나야마 대사는 최 원장과 함께 방한, 파주의 하늘묘원을 찾았다. 성묘를 마친 후 최 원장은 자신이 묻힐 가묘를 보여주었다. 그때 가나야마 대사는 깜짝 제안을 했다. “나도 죽으면 이 땅에 묻히고 싶네. 최 원장과 이 세상에서 못다 한 한일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저세상에서도 나누고 싶어서.” 뜻밖의 말에 최 원장은 되물었다. “정말이신가. 그럼 나의 묏자리 옆에 대사의 자리를 만들어 놓을 터니 나중에 오시겠나?”

최 원장은 자신이 조성한 가족묘지 공간에 가나야마 대사의 가묘를 만들었다. 그 후 대사는 자신의 가묘를 찾아 ‘영혼의 집이 마련됐다’면서 기뻐했다. 1997년 11월 가나야마 대사가 타계했다. 그 이듬해 대사의 아들이 아버지 유언에 따라 유골을 가지고 방한했다. 최 원장을 위시하여 서울의 지인들이 모여 조촐한 봉안식을 하고 가묘에 유골을 묻었다. 두 사람의 약속은 23년이 지난 후 이루어졌다.

가나야마 대사가 타계한 지 다시 23년이 지난 2020년 5월 최 원장도 92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이제 두 사람은 생전의 약속대로 파주의 묘원에서 도란도란 한일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정을 이어갈 것 같다.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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