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②] 1943년, 만주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②] 1943년, 만주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3.09.01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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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과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식민지 청년들이 꿈에 두었던 만주는 일본 본토는 물론 당시 일본 제국이 점령·통치하던 다른 지역과도 여러모로 달랐다. 일제는 괴뢰국인 만주국의 기초를 단단하게 굳히기 위해 본토 여행에는 도항증(渡航證) 등을 요구하면서 규제했지만, 만주로 가는 길은 터놓았다. 

만주국(1932~1945)의 통계를 보면, 건국 초기 만주는 113만㎢의 넓이에 약 3,000만 명의 인구였다(1932). 일제 패망 직전에는 인구가 5,000만 명 가까이로 불어났다. 제국주의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은 중국인(漢族), 만주인, 몽골인, 조선인, 일본인 등 5개 민족이 조화를 이루어 사는 ‘오족협화’(五族協和, Five Races Under One Union)를 선전구호로 내걸었다. 실상은 중국인이 다수(85%)로 중국어와 일본어를 공용어로 쓰는 내용상 일본의 식민지였다.

오족협화 상징, 만주국의 국기(國旗)와 오족협화를 주제로 한 만주국의 우표
오족협화 상징, 만주국의 국기(國旗)와 오족협화를 주제로 한 만주국의 우표

19세기 후반 대흉년(1869~1871)에 이은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만주로 떠나기 시작한 조선인들의 행렬은 계속 이어졌다. 1910년 이제는 나라가 없어졌다. 나라 잃은 국민들은 국권을 되찾기 위해서 또 자유롭고 광활한 만주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개척하기 위해서, 저마다 목적은 달랐지만 꾸준하게 만주로 떠났다. 말이 만주지, 만주는 넓었고, 지역마다 삶의 모습은 다 달랐다. 이주 초기 만주로 떠난 사람들은 너나없이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잃어버린 조국을 찾겠다고 떠난 항일혁명가(정화암)들은 이런 환경을 마주했다. 

북만주의 겨울은 너무도 춥다. 영하 30~40도의 강추위에 옷을 제대로 빨아 입을 수가 없다. 목욕도 제대로 할 수 없다. 침구도 변변치 못하다. 이가 들끓고 몸에서는 냄새가 나고 참으로 죽지 못해 사는 꼴이다. 쌀밥은 구경하기조차 어렵고, 어쩌다 쌀을 구하더라도 봉지에 넣어 두었다가 제사 때나 환자가 생겼을 경우에 조금씩 꺼내 쓰는 정도였다. 오직 감자, 옥수수, 조만을 먹고 살았다. 반찬도 마찬가지다. 중국 사람들이 채소를 거두어 간 후 그 밭에 떨어진 잎(시래기)을 주어모아 소금에 절여 먹었다. 그나마 소금마저 귀하고 고춧가루나 다른 양념도 넣지 못하고 배춧잎 그대로 먹는 경우가 많았다.(<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민음사)

그렇지만, 우리 한(韓)민족이 어떤 민족인가? 기록을 보면 1875년경부터 만주로 떠난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의 우리 농민들은 연길을 중심으로 벼농사를 짓기 시작해, 1900년대 들어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둔다. 

“만주의 황무지에서 중국 사람들이 수수밥이나 먹고 옥수수나 먹었지 흰쌀밥을 먹어 봤습니까? 그런데 우리 농부들이 흰쌀을 만들어낸 겁니다. 그 넓디넓은 황무지를 전부 우리 손으로 피땀 흘려 개척한 겁니다. 어디 가서나 그저 물이 딸딸 내려가면 거기에 반드시 논을 트는 것은 우리 사람들입니다. 거기서 흰쌀이 나오는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여름에도 발 벗고 논에 들어가기를 싫어합니다. 또 쌀농사를 지으려면 벼하고 가라지를 분류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걸 분류하지 못해요.”(<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민음사)

만주는 어느 한편 이렇게 가난했는가 하면, 도시 지역에서는 이국적인 모습이 많이 감도는 진짜 특이한 공간이었다. 

만주는 국제사회와는 완전히 폐쇄되어 있으면서도 그런 폐쇄 속에서 은근한 풍요를 자랑하고 있었다. 일본이 삼켜버리기에는 너무나 광활한 땅이었다. 국가의 행정·법·질서가 미치지 못하는 공지(空地)는 사람들을 활달하게 만든 것 같다. 야생적이고 야만적인 면도 있지만, 텍사스적인 열기, 짙은 투전판의 분위기, 겨울밤 눈보라와 눈썰매, 독한 고량주, 일어·노어·중국어·조선어의 혼합, 강도단·비적·마적단의 횡행 등 남성적인 역동성이 살아 있었다.(<세기의 격랑: 이한림 회상록>, 팔복원)

일본의 만주 침략이 본격화된 1930년대 이후 일본제국은 만주 이주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일본에서 조선에서 또 중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조선인과 일본인도 많을 때는 각각 150만 명 가까이 살고 있었다. 조선인은 주로 영농과 이주 등 생존과 생활이 목적이었지만, 일본인은 만주국을 만들고 지키고 관리하기 위한 인력들이 많았다. ‘만주의 동인도회사’라는 별칭을 가진 남만주철도주식회사(滿鐵, 1906~1945), 사령관이 만주국 주재 일본제국 대사를 겸하기도 한 관동군(關東軍, 1919~1945), 그리고 수많은 기업들이 있었다. 1940년대 초반 관동군의 규모는 100만 명에 이르기도 했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1906.11.26.~1945)는 ‘만철’(滿鐵)이라는 약칭으로 불렸는데, 이름 그대로 만주국의 철도회사로, 일제시대 만주국을 경영하는 ‘만주의 동인도회사’ 역할을 했다. 초기에는 민간이 50%의 지분을 갖고 있었으나 일본 정부가 100%의 지분을 소유하면서 공기업처럼 운영됐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넘겨받은 철도와 철도 부속지를 기반으로, 철도는 물론 광산, 항만, 정유, 유통, 제조, 출판, 교육, 의료 등으로 범위를 넓혀, 관동군이 정치와 국방을 담당했다면, 만철은 만주국의 경제를 장악했다고 할 수 있다. 일제가 항복하자 만철은 다시 러시아의 손에 넘어갔다가, 중국이 공산화된 뒤, 1952년 경영권이 중국 측에 반환됐다.  

관동군(關東軍)은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조차한 중국 요동 반도의 여순과 대련을 중심으로 한 관동주(關東州, 3,462㎢)와 남만주철도의 부속지를 수비하는 일본 육군 관동도독부 육군부를 시초로 한다. 처음의 규모는 6개 독립 수비대대였으나,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할 때까지도 관동군의 병력은 1만 명 정도였다. 1932년 만주국이 수립되고 1938~1939 사이 소련군과의 충돌 이후 병력을 증강하기 시작해 1941년 무렵에는 14개 사단 규모로 늘어났다. 괴뢰국 만주국의 지배자 역할을 했다.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 창춘) 중심가(대동대가), 정부기관과 백화점 등이 몰려있다. 1940년대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 창춘) 중심가(대동대가), 정부기관과 백화점 등이 몰려있다. 1940년대

   
박정희는 이런 거친 만주에도 적응을 잘했다. 소수인 조선계 생도에 대한 군관학교의 민족적 차별도 잘 이겨내고, 선배들의 구타도 잘 참아냈다. 박정희는 이유 없이 때리는 선배들을 기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매를 다 맞고 그들과 더욱 친하게 지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1기생 선배 이기건에게 “일제는 곧 망합니다. 우리는 독립하고야 말 것입니다”라고 되풀이해 말하곤 했다. 조선인 생도들끼리의 술자리 모임에서 어느 날은 벌떡 일어나 “선배님들, 이런 노래 모르시지요”라며 주먹질을 하면서 독립군 노래를 불렀다.(전인권, <박정희평전>, 이학사)

이 시절의 경험이 박정희에게 심어준 것일까? 박정희는 훗날 국가와 민족 개인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한다.

국가는 민족의 후견인입니다. 국가 없는 민족의 번영과 발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우리가 나라 없는 민족이 되어서 얼마나 서러움을 받았습니까, 나라 없는 민족은 개인이 아무리 우수하고 능력이 있더라도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민족도 아무리 그 민족이 우수하더라도 그 우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잘 되어야 우리 개인도 잘 될 수 있는 것입니다.(박정희, 1973년 연두기자회견)

박정희와 김대중이 만주에 머물렀거나 관심을 가졌던 시기는 1930~40년대다. 이미 넓은 만주를 이리저리 가로지르는 철도가 부설됐고, 부산과 서울에서 열차표를 끊어 만주 봉천(奉天)으로, 바이칼(Baikal)호를 지나 러시아의 이르쿠츠크(Irkutsk), 독일제국의 베를린으로 갈 수 있을 때였다. ‘만주의 현관’(玄關)이라는 다롄(大連)에서 신경(新京), 하얼빈(Harbin) 사이에는 시속 130km가 넘는 고속열차 아시아호가 굉음과 함께 허연 연기를 내뿜고 달렸다. 증기기관차로서 당시 이 정도 시속은 놀라운 속도였다. 조선에서는 이 마을 저 동네에서 집을 정리해 손에 손잡고 만주로 떠났다. 풍경은 거칠었지만, 마음속으로 지닌 여러 형태의 욕망과 미래는 제각각이었다. 부모의 꿈은 단순했지만, 어디서나 젊은이들은 꿈이 많아 결코 가난하지 않았다. 

빅정희는 “조선은 곧 독립이 된다”고 하면서도, 만주(40.4~42.3)와 일본(42.10~44.4)에서 사관학교 교육을 우수한 성적으로 이수했다. 그는 1944년 4월 졸업하고, 만주로 배치돼, 7월 만주국 소위로 임관돼 열하성(熱河省)에 배치된다. 그는 1년 만인 45년 7월 만주군 중위로 진급한다. 열하성(熱河省)은 중국의 성으로 지금의 허베이성, 랴오닝성, 내몽골자치구의 일부를 차지한, 18만㎢에 600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1928년 설치됐다가, 1933년 일본군에 점령당했다. 그 뒤 열하성은 만주국으로 편입됐다. 1955년 공산 중국이 설립된 뒤 행정구역 개편으로 없어졌다. 

김대중은 1939년 지역 명문 목포공립상업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했다. 목포(木浦)는 당시 남북한을 합쳐 7대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목포는 일본의 나가사키와 중국 상하이의 중간에 위치한 관계로 국제무역의 거점 역할을 했고, 호남선의 종착지로 전국의 쌀과 목화, 해산물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중요한 항구였다. 당시 5년제 ‘목상’(木商)은 전국에 알려진 명문이었다. 목포에는 상업학교 하나뿐이었다. 김대중은 전시 특별조치로 조기 졸업을 했다(1943.12). 그리고 대학 진학도 여의치 않았다.

진학의 꿈은 좌절됐지만 만주 건국대학교에 가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주로 갔더라면 해방 이후 찾아온 38선 분단으로 남쪽 땅을 밟지 못했을지 몰랐다. 세상은 새옹지마였다.(김대중, <김대중회고록>, 삼인)

그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전남기선주식회사라는 해운회사에 취직했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은 일제 말의 징집을 피하기 위해 생년월일을 1925년 12월 3일로 바꾸었다. 그래서 그는 징집 순위가 밀려, 일제의 강제징집을 피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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