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미희의 음악여행 ㊿] 피아노, 그리고 리스트와 쇼팽
[홍미희의 음악여행 ㊿] 피아노, 그리고 리스트와 쇼팽
  • 홍미희 기자
  • 승인 2023.10.16 09: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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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를 치는 리스트’: 왼쪽부터 알렉상드르 뒤마, 빅토르 위고, 남장을 한 조르주 상드, 파가니니, 로시니, 피아노를 치는 리스트, 마리 다구 백작부인, 석고상은 베토벤이다.[사진=위키백과]
‘피아노를 치는 리스트’: 왼쪽부터 알렉상드르 뒤마, 빅토르 위고, 남장을 한 조르주 상드, 파가니니, 로시니, 피아노를 치는 리스트, 마리 다구 백작부인, 석고상은 베토벤이다.[사진=위키백과]

(서울=월드코리안신문) 홍미희 기자    

피아노는 이탈리아의 ‘크리스토포리’가 1700년 즈음 만든 악기다. 원래 이름은 ‘gravecembalo col piano e forte’(셈여림이 있는 그라비쳄발로)였다가 ‘포르테피아노’, ‘피아노포르테’로 줄여서 불렸고, 나중에는 ‘피아노’가 되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피아노의 장점은 강약조절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전의 쳄발로를 발전시켜 음량이 커지고 강약조절이 되는 피아노가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의외로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연주하는 중간에도 줄이 끊어질 정도로 약하고 완성도가 낮은 악기였기 때문이었지만 점차 튼튼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로 발전하며 인기가 높아지게 되었다.

산업혁명 이후에 나타난 막강한 경제력을 가진 새로운 상류층 ‘부르조아’는 거실에 피아노를 놓는 것을 기본으로 생각했고, 결혼을 앞둔 딸들에게 피아노는 필수교양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피아노를 잘 가르치고 연주할 수 있는 음악가의 위치는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음악가는 귀족이나 종교에 의지하지 않아도 경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심지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 되었다.

페르디난트 바이어
페르디난트 바이어

당시 유명했던 피아노 선생님이 우리에게도 친숙한 ‘바이엘’과 ‘체르니’, ‘하농’이다. 바이엘은 독일에서 태어난 ‘페르디난트 바이어(1803~1863)’가 만든 피아노 연습곡집의 이름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이 교본이 일제강점기에 일본을 통해 전해졌기 때문에 바이어가 아닌 ‘바이에루’ 즉 바이엘로 쓰였다. 바이엘은 피아노 초보자를 위한 연습곡집으로 어린이를 위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막상 독일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카를 체르니
카를 체르니

오스트리아 출신의 카를 체르니(1791~1857)는 보헤미아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음악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11살부터 4년간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또 그 이후에도 꾸준하게 베토벤과 연락을 주고받아 지금까지 남겨진 편지들이 베토벤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15세가 되던 해부터는 본격적으로 피아노 선생님이 되었는데 빈의 상류층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수입이 엄청났다고 한다. 체르니가 작곡한 에튀드들을 모아 놓은 것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체르니 100, 30, 40 등이다.

샤를 루이 하농
샤를 루이 하농

하농 역시 음악가의 이름을 그대로 딴 것으로 프랑스의 ‘샤를누이 아농(1810~1900)’의 작품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Hanon을 그대로 발음하여 하농이라고 불리는데 원래 제목은 ‘명피아니스트가 되는 60 연습곡’이다. 손가락 테크닉과 음계 연습곡으로 많이 쓰이며 피아노 학원에서 많이 들리던 무한 반복의 ‘도레미파솔라시도시라솔파미레도…’가 바로 하농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정말로 레슨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리스트와 쇼팽이다. 이들은 서로 나이도 비슷했고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고 불렸다. 또, 각자 태어난 곳에서 파리로 이동하여 활동한 것도 같다. 많은 사람이 이 두 사람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했지만 사실 이들은 작곡자 겸 연주자로 더 유명하다. 지금은 작곡자와 연주자의 영역이 다르지만 낭만음악의 시대까지만 해도 일반적으로 작곡자와 연주자가 동일했다. 본인이 작곡한 곡을 본인이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손가락이 길었던 라흐마니노프는 넓은 화음을 한꺼번에 누른다거나 리스트의 경우 기교가 많은 빠르고 화려한 곡을 작곡하는 등 자신의 장점을 잘 알고 그 매력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곡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프란츠 리스트
프란츠 리스트

헝가리 출신의 리스트(1811~1886)는 빠르고 화려한 연주와 잘생긴 외모로 유명했다. 그는 당시 유명했던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파리에서 활동했다. 파가니니의 영향을 받아 기교를 중시했던 그는 현재까지도 가장 위대한 비르투오소(명연주자)로 손꼽힌다. 리스트는 객석에서 자신이 연주하는 빠른 손과 멋진 얼굴이 보이도록 피아노의 위치를 돌려놓았고, 무대 뒤에서 등장하기도 했으며, 피아노의 의자는 스툴형으로 바꾸는 등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했다. 그리고 의상도 중국에서 가져온 비단으로 만들어 입었던 패셔니스타였다. 그가 무대에서 연주하면 기절하는 열성적인 여성 팬들도 있었다.

리스트가 같이 생활했던 마리다구 백작부인이 그에 대해 묘사한 글을 보면 “그는 하얗디하얀 얼굴에 맵시 있는 큰 키, 그리고 마른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큰 눈은 바다 색깔이었고 머리카락은 햇살에 너울대는 물결같이 빛났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인기 있던 리스트는 36살에 연주회를 더 이상 하지 않고 작곡에만 힘쓰겠다고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만든 장르가 단악장 형식의 교향시(Symphonic poem)다. 그리고 54세에는 가톨릭의 수사가 되어 많은 후진을 양성하는 음악가이자 교육자, 성직자로 생을 마쳤다.

프레데리크 쇼팽
프레데리크 쇼팽

화려하고 강한 개성을 지닌 리스트와는 달리 쇼팽(1810~1849)은 여리여리하고 하얀 얼굴에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피아니스트였다. 폴란드 출신의 쇼팽은 리스트와 서로 경쟁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인정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였다. 리스트는 피아노의 신으로, 쇼팽은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렸다. 리스트는 많은 사람 앞에서 많은 공연을 했지만 쇼팽의 경우 소수의 사람 앞에서 그것도 적은 횟수의 공연을 했다. 귀족적이고 섬세한 연주를 했던 쇼팽은 녹턴, 프렐류드, 에튀드, 왈츠 등 다양한 피아노곡을 작곡했다. 특히 그가 리스트를 통해 알게 된 연상의 연인인 조르주 상드는 결핵을 앓고 있던 쇼팽을 보살피며 그의 작품 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두 사람은 같은 낭만음악의 시대를 살면서 피아노의 세계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우리는 가장 일반적으로 인기가 있는 것들은 상투적이라고 생각하며 평가를 박하게 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들은 이유가 있다. 오늘은 제목만 들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리스트의 사랑의 꿈, 라 캄파넬라. 파가니니 변주곡, 초절기교 연습곡을 들으며 가을의 화려함을 느껴보자. 아니면 쓸쓸한 쇼팽의 이별곡, 빗방울과 같은 에튀드, 녹턴, 야상곡이어도 좋겠다.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회, 열광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회, 열광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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