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Garden] 신암동의 추억 속으로
[Essay Garden] 신암동의 추억 속으로
  • 최미자 재미수필가
  • 승인 2023.10.16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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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이어진 무더위의 기승 속에 불청객인 독감으로 가족이 좀 고생했다. 면역이 약해진 남편은 기침에 식사 거부까지 해 너무 힘들었던 여름. 그이는 도움도 안 되는 병원만 들락거리며 온갖 검사를 받았다. 자연식품을 동원하고 날마다 도라지 물을 얼마나 끓였는지.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나고 겨우 숨을 막 돌리려는데, 슬픈 소식이 날아왔다. 나의 친정 막내고모가 94세로 신암동의 터줏대감이었는데 장수 기록을 남기고 떠난 것이다. 대학교에 들어가며 처음 뵙던 고모라 인연이 남다르다. 고모부가 계신 국립묘지로 안장되던 날까지 나는 미국에서 추모기도를 드렸다.

1930년 말띠생 고모의 한 생애를 돌아본다. 중학생이던 14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순천여고를 졸업하자 아버지랑 서른 살까지 서울에서 함께 살았던 효녀였다. 고모들의 이름이 남자(부금, 옥식, 금식, 귀식) 같아 지금도 기억한다. 출가한 세 언니들의 삶도 순탄치 않았지만, 언니들의 사랑을 받으며 공주의 별명을 가진 귀식고모는 평탄하게 살아왔다. 서울 수송동 집에서 만난 고모부와의 인연도 재미있다. 전방에서 주말이면 외출을 나온 장교가 할아버지 집 현관에 서서 묵묵히 인사만 하고 떠나곤 했다 한다. 그때마다 고모는 문틈으로 잘생긴 총각을 슬그머니 보며 설레곤 했던 것 같았다. 할아버지 마음이 끌렸는지 한 살 더 많은 고모부랑 혼인을 시킨 것이다. 새까맣고 굵은 눈썹, 큰 눈을 가진 말 없는 빼빼 야윈 경상도 마산 총각이 할아버지는 믿음직해 보였던 모양이다.

강직한 성격인 간부후보생 출신으로 강원도 양구의 최전방에서 근무했다. 단칸방에는 살림살이라고는 쌀 궤짝 하나 달랑 있었다고 고모는 종종 들먹거렸다. 한번은 고모부가 봉급을 가져오지 않았다. 신혼인 고모가 어찌 사느냐며 방바닥을 치며 서럽게 울었다. 고모부는 손바닥이 아프다며 달래느라 방석을 들고 요리조리 따라 다녔다며 훗날 은근히 고모부를 자랑시켰다. 그런 남편이 요즈음 어디 있느냐며 우린 모두 한바탕 웃곤 했다. 고모부는 거의 슬픔이나 기쁨에 표정이 없던 분이었다.

내가 어렵게 재수를 하여 들어간 국립사범 대학이 당시 전국에 3개뿐이었다. 서울사대, 경북사대, 공주사대. 나의 여고 동창은 각도에서 한 명 뽑는 장학생에 선발되어 나의 선배가 되었다. 가정교육과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하여 잘살고 있다. 한편 나는 부모의 품을 떠나 처음 객지로 나가게 되니 어머니는 걱정이었다. 다행히 고모네가 있고 혹시 듬직한 경상도 사내를 내가 만날지도 모른다며 기대를 하며 대구로 보냈다. 전라도 광주에서 경상도 대구로 가는 길은 왜 그리도 멀었는지 모른다. 버스를 타면 울퉁불퉁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합천을 지나 거창과 대구까지의 도로들을 보며 지루했다. 기차로는 경부선의 대전역에서 내려 호남선의 서대전역으로 옮겨 갈아타며 종일을 보냈다. 4학년 때는 대학생 할인제가 생겨 어머니가 비행기를 타고 오라 하여 고생을 면한 적도 있었다.

신입생이 되던 무렵 고모네는 대구 동쪽 교외 반야월의 초가집에 방 두 칸에 살고 있었다. 시어머니와 세 어린 동생들과 난 한방에 살았다. 신입생 환영회를 하던 날은 밤이 늦어 고모는 대문도 열어주지 않아 문 앞에 서서 한참 나에게 벌을 주기도 했다. 물론 남학생 둘이 나를 데려다주었지만 말이다. 고모는 내가 좋은 대학에 다니는 것이 자랑스러웠는지 곧 신암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세를 든 방 두 칸의 한옥은 대학 정문 근처였다. 그곳에서 고모부를 닮은 미남 막내아들이 태어났다. 독립하고 싶은 나도 선배랑 근처에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했다. 방과 후엔 가정교사를 하며 용돈을 벌었다. 밤늦게 측후소 입구에 내려 밤길 언덕 골목길을 올라오며 집 생각이 나 서러운 날도 많았다. 고모는 동네 사람들과 계모임으로 돈으로 불려 나가더니 근처에 집을 하나 구입했다. 충실한 고모부도 이군사령부 수송대대장으로 승진했다.

결혼을 한 후 내가 남편의 근무지인 대구로 가 살며 고모랑 또 정이 들었다. 대학생이 된 나의 사촌동생인 큰딸이 우울증으로 앓고 있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고모부는 원래 병약하여 신혼 때부터 고모는 남편의 병 구환을 평생 하며 살아왔다. 젊은 날의 과도한 술 탓인지 고모부는 70살로 세상을 떠났고 이어 큰딸도 젊은 나이에 갔다. 고모부는 마산에서 신부와 수녀가 나온 천주교 집안의 후손이었다. 어느 날 고모는 천주교 신자로 개종했다. 살던 한옥마을이 재개발로 새 아파트로 변했지만 삶의 역사가 있는 그 동네의 삶을 지키며 마지막까지 살아왔다. 날마다 걸어서 파티마 병원에 나가 자원봉사도 성당에 가서는 기도생활을 하고 동네 놀이터에서 배우며 즐겁게 노인정에 다니고 있었다.

고모부가 남긴 연금으로 씩씩하고 당당하게 살던 막내고모. 미국에서 전화로 가끔 안부를 여쭈면 큰소리로 하하 웃던 고모. 2016년 우리 부부가 처음 함께 귀국하여 고모댁으로 갔을 때도 콧노래를 부르며 우리랑, 함께 살고 있는 큰아들 가족을 위해 아침 식사를 마련했다. 간단한 밥상이지만 여전한 전라도식 맛깔스런 김치와 오징어를 넣어 만든 부추전. 김수환 추기경이 부른 애모라며 콧노래를 연속 흥얼거리면서 낙천적인 삶을 보여주던 고모였다. 집을 사야 한다며 4년 동안 나에게 용돈 한 푼을 안 주어서 한때는 서운도 했지만, 나는 성실한 아내와 어머니로 살아 온 그분의 알뜰한 삶을 존경한다.

내가 가정교사를 하며 여러 학생들과 부모들의 삶을 보면서 인생을 배우며 성장해 갈 수 있었던 대구의 기억들, 함께 자취생활을 했던 영문과 오인숙 선배도 어디에 사는지. 대명동의 신부와 수녀님이 운영하던 여성을 위한 기숙사 생활. 또 대학시절 수성 못 근처의 영문과 남학생 선배가 만든 공민학교, 낮에는 일하고 야학을 하던 가난한 청년들에게 풍금을 치며 내가 음악을 가르쳤던 짧은 추억들이 그리움으로 밀려온다. 우리 모두가 서로의 스승이 아니던가.

필자소개
미주 한인언론 칼럼니스트로 활동
방일영문화재단 지원금 대상자(2013년) 선정돼
세번째 수필집 <날아라 부겐빌리아 꽃잎아> 발행
네번째수필집 <날아라 부겐빌리아Ⅱ>(2022)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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