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⑯]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파독 광부 간호사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⑯]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파독 광부 간호사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3.12.23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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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과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군사정부 아래에서 신설된(61.7.22) 경제기획원은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발표한다. 이런 국가 주도의 종합적인 경제개발 계획은 제1공화국 때(1958)도 제2공화국 때도(1961) 입안이 됐다. 박정희 정부가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의 내용을 베꼈다고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2공화국 정부도 계획을 잘 짰다.

소련에서 스탈린(J. Stalin, 재임 1922~1952)이 집권한 뒤 실시한 제1차 5개년 계획(1928~1932)이 성공하면서 경제개발계획은 사회주의 국가와 저개발국에서 인기였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아시아에서도 1950년대 타이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필리핀, 네팔, 파키스탄, 인도 등이 나라 형편에 따라 3개년 또는 5개년 계획을 세워 집행했다. 6.25 전쟁 때문에 우리가 좀 늦은 편이었다. 이 나라들 가운데서는 인도가 제일 성공적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뒤늦게 따라가는 우리의 경우, 문제는 투자할 자금이었다. 통화개혁도 해 봤고, 민간기업의 외국 차관에 대해 정부가 지불보증을 해주는 제도도 도입했다(1962). 그러나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미국 원조에 의존해 예산을 짜는 나라에 공장을 건설하라고 돈을 빌려주는 외국 금융기관은 없었다. 수출도 엄청난 적자였고, 최대 전주(錢主)인 미국도 차관에는 아직 선뜻 나서지 않았다.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시작할 때의 이야기다.

총 3,205억 원에 달하는 투자자금도 연간 7.1%의 성장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돈이 얼마인지를 간단한 회계를 통해 계산해 낸 것에 불과하였다. 그 돈이 어디에 있는지, 누가 꾸어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하등의 계획이 없었다. 당시 미국의 전문가들은 한국의 군사정부가 작성한 제1차 개발계획을 두고 ‘가난한 사람의 쇼핑 희망 리스트’에 불과하다고 비꼬았다.(이영훈, 『대한민국역사, 나라만들기 발자취 1945~1987』, 기파랑, 2013)

그냥 쉽게 계산해도 한 해에 6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경제개발계획이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한 해 예산이 62년 689억 원(본래는 6,891억 환이었는데, 62년 6월 9일 화폐개혁으로 10분의 1로 평가절하되면서, 단위도 환에서 원으로 바뀌어 689억 원이 된다)으로, 예산의 87%에 해당한다. 국가 예산이 63년 768억, 64년 698억, 65년 848억 원으로 늘지만, 국가 예산이 국방과 교육, 주택건설 등에도 써야지 경제개발에만 투자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해마다 봄이 오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후진 농업국가가 수출국가, 공업국가로 바뀌는, 박정희의 표현대로 ‘산업혁명’을 이루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금과 인력 등 막대한 투자가 장기간 계속돼야 하는 엄청나게 어려운 과정이고, 작업이다.

국내에는 돈이 없었다. 그러니까,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온다. 가능한 방법은 외국에서 돈을 빌려오거나 수출에서 흑자를 내는 방법뿐이다. 우리 경제에서 무역수지 흑자는 20년도 훨씬 지난 1986년에야 가능해지는 일이다. 가난한 데다 부패하고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나라의 상황은 정말 딱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무상원조가 차관으로 점차 바뀌기 시작했지만, 원조(援助)경제가 외자(外資) 경제 체제로 바뀌는 계기는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실시였고, 본격적으로는 한-일협정 체결 뒤의 일이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소요 자본의 대부분을 외국자본 도입에 의존했고 따라서 재정차관은 물론 상업차관 도입과 외국인 투자, 유상 기술도입 등이 일제히 실시됐다. 그러나 1차 경제개발 초기에는 상업차관이나 외국인투자의 도입은 활발하지 못했고 재정차관이 중점적으로 도입되다가,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 상업차관과 외국인 직접투자가 급격히 확대됐다. 1964년에 9,900만 달러이던 외채 규모가 1965년에 1억7,700만 달러, 1966년 2억6,100만 달러로 급증한 것이다.(강만길,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1984)

이 상황에서 같은 분단국가였던 독일이 재정차관의 첫걸음을 뗐다. 이승만 정부 때부터 협의해오던 서독 정부의 개발원조(차관)는 1961년 12월 마무리됐으나, 액수는 1억5,000만 마르크(4,000만 달러)였다. 상당한 액수였지만, 62년부터 시작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다른 자금원이 필요했다.

5.16 군사정부의 고민은 이어진다. “혁명은 권력 탈취를 목적으로 하는 단순한 쿠데타와 다르다. 혁명은 무력으로 정부를 뒤엎으면서 내놓은 약속(혁명공약)을 지키고, 이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져야 한다.” 국내에는 아무리 찾아도 돈이 없었다. 이들이 찾은 방법은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월남)파병’ ‘해외 인력수출’이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한국은 미국, 자유중국(대만), 베트남(월남), 프랑스, 영국, 필리핀, 터키, 서독, 바티칸 등 단지 9개국과 공사(公使)급 이상의 외교 관계를 유지할 정도의 허약한 나라였다. 이 가운데 미국은 자본주의 진영의 맹주로, 또 6.25 전쟁의 지원국으로 상호방위조약에 따른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하고 있었지만, 일본과는 국교가 정상화 되지 않은 상태였다.

전후 복구를 하면서 국가 재건을 계획하던 이승만 정부, 장면 정부 등은 유일하게 서독 정부와 차관 교섭을 진행하고 있었으나,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독은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의 설치로 한국과 분단 문제에 대해 자체적으로 인식의 변화를 경험한다. 베를린 장벽 구축 이후 서독은 분단국가인 한국에 대한 이해의 폭이 달라지고, 국제적인 반공(反共) 전선의 강화를 위해 한국에 대한 차관 제공을 결정하게 된다. 이에 따라 5.16 군사정부의 정래혁 상공부장관은 1961년 12월 독일을 방문해 그 전부터 협의해오던 7,500만 마르크(2,000만 달러 정도)의 개발차관 공여를 매듭지을 수 있었다. 서독은 한국의 경제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식량의 자급자족과 전기, 통신, 철도, 항만 등 산업 인프라의 건설로 여기고 이 분야에서 적극적인 참여를 노력했다.

하지만 서독의 차관은 충분치 않아, 5.16 군사정부는 더 많은 재원 확보를 위해 가능한 방법으로 한일국교정상화를 선택한다. 당시 많은 나라들이 2차 대전 당시 추축국의 침략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전쟁 피해 배상금을 선택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과 같이 식민지배로 인한 피해 배상 문제는 익숙하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 유럽의 열강들은 길게는 수백 년 동안 식민지를 가졌던 관계로,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은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고, 지금도 집단학살과 같은 개별적인 인도적인 범죄에 대해서는 사과도 하고 배상도 하지만, 식민지배 전체를 문제로 놓고 사과나 배상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거부하는 입장이다. 수백 년에 걸치는 식민지배는 역사의 과정이지, 그걸 따로 사과하고 배상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제국주의적인 사고에 젖어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사실 독일은 1, 2차 대전 과정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사망하거나 다쳐서 농업이나 공업에 종사할 인력이 상당히 부족했다. 19세기 후반기 독일에서는 많은 젊은이나 젊은 농부 가족들이 꿈을 찾아 신대륙으로 떠났고, 그 부족한 인력을 이웃 폴란드 등으로부터 수입하는 방식으로 대처했다. 그런 데다 1차 대전에서 독일군은 200만이 넘는 사망자와 420만이 넘는 부상자를 냈다. 이 숫자는 민간인의 피해와 전후의 전염병 등으로 본 피해는 포함하지 않은 숫자였다.

2차 대전의 피해는 그보다 더 심했다. 독일은 군인 사망자 400만 명, 민간인 사망자 200만 명을 기록했다. 그래서 1, 2차 대전에 참전해 독일군과 싸웠고, 육군 원수(元帥), 자작(子爵)의 작위를 받은 영국의 몽고메리(Sir Bernard Law Montgomery, 1867~1976)는 “전쟁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전쟁도 예외는 아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남기는 것은 오로지 파괴와 슬픔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그 의도가 무엇이든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무겁게 말했다.

독일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됐으나, 전쟁을 일으킨 입장에서 어디 억울하다고 말할 데도 없었다. 독일은 2차 대전 중 연합국으로부터 산업시설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공습과 공격을 받은 관계로, 많은 피해가 있었고 전후 복구에 더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인종이나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유대인 600만 명, 폴란드인, 소련군 등 1,000만 명을 학살한 독일이 외국의 근로자들 없이는 전후복구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은 아이러니였다.

전쟁 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드레스덴. ‘엘베강의 피렌체’로 불렸던 아름다운 드레스덴(Dresden) 시가지 90%가 파괴되고 25,000명 이상의 시민이 사망했다. 연합군은 1,200여 대의 폭격기를 동원해 1945.2.13.~15 사이에 4차례에 걸쳐 실시됐다.

게다가 동독은 1961년 서독과의 국경을 폐쇄했다. ‘라인강의 기적’(The Miracle on the Rhine, Das Wirtschaftswunder)이 진행되는 시기, 독일이 경제부흥의 정점을 향해 가던 시점의 인력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다. 또 당시 독일의 젊은이들도 지금의 우리와 같이 광부나 간호사 등 힘든 일은 피하고 있었다.

서독 기업들은 다급하게 정부 측에 근로자의 수입이 시급하다고 했고, 정부도 재빨리 반응했다. 서독 정부는 이탈리아와는 일찌감치(1955) 노동자 모집협약을 체결했지만, 인력 부족이 계속됐다. 독일 정부는 그리스와 스페인(1960), 터키(1961), 포르투갈(1964), 유고슬라비아(1968) 정부와 노동자 모집과 고용에 관한 협약을 맺는다. 이 시기 독일 정부는 외국인 근로자와는 1년 계약을, 길어야 2년 계약을 맺었고, 아주 예외적으로 3년 체류를 허가했다.

우리나라 노동청과 독일탄광협회는 1963년 12월 ‘서독 파견 한국 광부 임시고용계획’ 관련 협정을 맺었다. 이렇게 선발된 광부는 1963년 12월부터 독일로 떠난다. 또 간호사나 간호조무사에 관해서도 1966년 한국해외개발공사를 통한 알선에 이어, ‘한국해외개발공사와 독일병원협회 협정’(69.8)을 통해 국가적 차원에서 인력파견이 시작됐다.

64년 독일을 방문한 대통령은 “여러분 이게 무슨 고생입니까? 나라가 못살아 여러분이 이국땅 지하 수천 미터에서 이런 고생을 합니다.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하고 울먹였다.

광부와 간호사 인력수출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엄청났다. 500명의 파독(派獨) 광부를 모집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46,000명이 몰려들었다. 고졸자는 기본이고 대졸자도 많이 지원했다. 이들은 광산 일이 서툴렀다. 1962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7달러, 서울의 실업률은 16.4%였다. 파독 초기 광부들의 월급은 평균 650~950마르크(162~237 달러 상당)로 실적에 따라 달랐지만, 국내 직장인 평균의 8배였고, 한 달 월급이 연평균 소득의 2배가 됐다.

1963년 12월 22일 1차로 광부 123명을 시작으로 1977년까지 모두 8,395명의 광부들이 독일로 나갔다. 이들은 3년 계약이 끝나고 형편에 따라 귀국하기도 했고, 유럽 내 다른 나라나 미국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진짜 강철같은 의지(意志)를 지닌 사람들이였다.

광부보다 늦게 1965년부터 독일로 건너가기 시작한 간호사나 간호보조원도 1976년까지 10,371명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힘들고 생소한 업무에 시달렸던 간호사들은 금방 성실성과 헌신을 인정받았다.

“30대 중반에 남편을 여의고 3년째 혼자 남매를 키우던 어려운 상황에서 선택한 독일행이었습니다. 한국에 두고 온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악착같이 벌었지요. 돈 드는 바깥출입은 일절하지 않았습니다.” 월금 800마르크(당시 우리 돈 54,000원) 가운데 600마르크(40,500원)를 꼬박꼬박 한국의 친정어머니한테 송금하였다. 쌀 한 가마니에 3,000원, 초급 공무원의 한 달 월급이 3,300원 하던 때였다.(김육훈, 『살아있는 한국근현대사교과서』, Humanist, 2007)

지하 막장에서 더 힘든 육체노동을 하는 광부들의 사연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이들 가운데는 3년 모은 돈으로 간호사와 결혼을 한 뒤 자영업을 시작해 부자가 되기도 하고, 월급 모은 돈으로 공부를 계속해 박사 학위를 취득해 대학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끈기와 인내가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한참 뒤인 2008년 진실화해과거사위원회는 보고서를 통해, 1964~1975년까지 광부와 간호사 등 독일 파견 인력의 송금 총액을 1억 7,000만 달러로 추산했다. 당시 총 수출액과 대비한 이들의 송금 액수는 1966년 1.9%, 1967년 1.8%정도로 나타나, 외로움과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이들이 송금한 외화는 경제성장의 종잣돈으로 상당한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광부와 간호사의 독일 파견에 앞서, 우리나라는 해외 이민에도 눈을 떠 1962년 3월 해외이주법을 제정 공포하고, 브라질(1962),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볼리비아 등으로 공식 이민을 내보냈다. 미국도 1965년부터 한 해 2만 명씩의 한국인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다.

이 무렵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학생들도 90% 이상이 공부를 마치고도 미국이나 다른 외국에 정착하고, 귀국하지 않았다. 국내에는 이들이 일할 곳이 많지 않았다. 이들은 70년대가 지나면서 조국의 부름에 응한다.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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