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1]'아버지의 6.25 일기'
[연재-1]'아버지의 6.25 일기'
  • 서지원 전 텍사스어스틴상공인회장
  • 승인 2012.07.0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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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 어스틴 서지원 회장이 선친의 6.25 피난일기 공개

서지원 회장
필자 서지원씨는 텍사스 어스틴에서 부동산 컨설팅업에 종사하고 있다. 고향은 진주. 그는 1970년대 후반 자신이 경영하던 화장솔 공장을 위한 오더를 받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정착한 케이스다. 그가 소장하고 있던 선친의 전쟁일기를 본지에 공개했다. 그의 어린 시절 경험이기도 하다. 이를 본지에 연재한다.<편집자주>

<들어가는 글> '아버지의 6.25 일기'를 공개하면서

62년전 6.25 전쟁이 났다. 인민군이 탱크를 몰고서 물밀듯이 내려온다는 뉴스를 듣고서 모두들 어쩔바를 몰랐다. 당시 이남에서는 좌익 활동을 하던 사람들을 색출하여 처단하던 무서운 세상이었다. 우익으로 이곳에 살든지 아니면 이북으로 도망쳐 가던지 정말 위험 하고 험악한 분위기였다.

제주도 4.3사건,거창 학살사건,통영 학살사건 등이 그 사례다. 모두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이기에 우리 친척들도 친구들도 그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인정과 눈물은 사라지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학살 처형 고자질 나쁜 것들만 모두 나열 하는 무서운 세상 이었다. 이념과 사상 이란 빗자루를 가지고 좌익 진보 사상을 가진 자들을 모두 쓸어 버렸다.몇년을 계속 쓸어 버리니까 깨끗해 졌다.

6.25 전쟁이 끝나자 이남에서는 사상 전향서에 서명만 하면 옛날의 것은 더이상 문제로 삼지 않고 자유롭게 생업에 몰두할 수 있게 했다. 통영 산양면 용화산 굴속에 숨어서 오랜 세월을 이북 라디오만 청취하고 지내시던 좌익 골수분자인 친척 이 가족들의 생계 때문에 경찰서에 가서 자 하고서 전향서에 사인한 것도 그때였다.

그는 오랜 세월을 굴 속에서 지낸 탓으로 처음엔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해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의 거제도 포로 수용소의 반공 포로 석방 뉴스가 나왔다. 서방 세계가 깜짝 놀란 빅뉴스였다. 이대통령은 그런 점에서 좌익이든 우익이든 모두 섞어서 하나로 뭉쳐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겠다는 큰 꿈을 가진 분이라 생각된다.

6.25 전쟁 62돌이 지났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특히 10년전에 작고하신 선친생각이 간절하다. 전쟁으로 피난민 행열 따라 소풍가듯 떠나 도착한 곳은 진주에서 15리 밖의 금산면 자골 이었다. 선친의 6.25 일기는 7월25일부터 시작된다. 월드코리안신문의 요청으로 이 일기를 공개한다.

<일기>

07/25/50 : 충청도와 전라도 방면에서 군경과 피난민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평화롭던 이 고장도 술렁거리게 되었다. 나날이 보도 연맹원은 C.I.C.와 경관에 의하여 구금 되고 온 거리는 전율과 공포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런가운데도 오정래군은 매일 새로운 전황을 이야기 해주며 거동도 태연 하였다.

그러던 오군이 의외에도 C.I.C.에 체포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연 하였다. 오군은 보도연맹원도 아니며 내가 부산 매일신문을 맡아보면서 진주 지구 특파원으로 와 있었다. 하등 신변의 위험을 느낄 이유도 없었거니와 우리들 엮시 오군에 대하여 아무런 걱정 할것도 없었다.

그런 오군이 뜻밖에도 체포 된것은 뒤에사 안 일이지마는 해방후 사설 탐정 기관에 있던 사람과 개인적으로 감정이 좋지 못한 사이 었다나 그 사람이 이 기관이 당국에 의해 해체 되면서 진주 C.I.C. 에 근무 하게 되었으며 이 기회를 놓칠새라 오군에게 보복을 한 것이었다.

참으로 분노와 개탄을 금치 못할 일이였다. 형인 정돈군이 먼 친척벌 되는 사람이 광주사령지구 연대장으로 있다면서 몇번이나 만나서 일이 잘 풀릴것이라고 진주에서 석방의 날을 기다리고 있을때 시시 각각으로 진주는 살기 등등해 가기만 했다. 이런때 앞집 화랑 다방과 김변호사 집에서는 이삿짐을 나르드니 며칠사이에 땔나무와 허드래 물건까지 싣고 어디론가 소개를 하는 것이었다.

이분들은 시 시국 대책위원들인 만큼 시국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므로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날이 갈수록 짐을 싸는 사람,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이 차차 늘어갔다. 어느날 거리도 적적 한데 갑자기 앞집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뛰어 나가보니 두 군인이 화랑다방 아주머니를 끌고 나오는데 한 군인은 소련기를 들고 있었으며 아주머니는 창백한 얼굴에 말도 제데로 못하고 떨고 있었다.

이 군인들은 이날 화랑다방 이층을 강제로 비우게 하고 들어온 패주병 이었다. 아주머니는 불현듯 4국기가 생각나서 이층으로 올라가서 벽장에둔 기를 안고 내려오는것을 수상하게 여긴 군인이 달려와서 기를 빼았고는 그 중에서 소련기만 들고나와 아주머니를 빨갱이로 몰고 끌고 나오는 것 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이 기는 문화 건설대에서 경축일이면 4국기를 걸어 놓고 행사를 한것이며 이 기 외에도 외국기가 있을 것이라 했다. 두눈이 뒤짚힌 이들에게 내말이 들릴리가 있을까, 한 사람이 표독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내 배에다 총을 들이 대며 싸죽인다고 위협하며 아주머니를 끌고 가는 것이다. 아주머니는 두팔을 붙들린채 처절한 모습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전율과 공포에 울부짖는 비참한 소리만 고요한 거리에 메아리를 남기며 사라져 갔다. 진주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계시는 외삼촌 께서 이른아침에 내려오셔서 학교에 패주병들이 들어왔으며 사택도 비우라 하니 아무튼 소중한 짐만 챙겨서 가져 오겠다 하셨다. 외삼촌 짐과 우리짐을 한칸 방에다 넣고 두꺼운 판자로 문을 봉하고 이렇다 할때는 손쉽게 가져갈 물건만 챙겨 두었다.

아내는 배 건너로 가서 발동기 대금으로 십구만원과 정종 외상값을 몇군데 음식점에 가서 주는 대로 받아서 또 우리가 갚아야 할데 찾아가서 갚고 만사천원을 예비금으로 두고 있었다. 이때 잊지못할 고마운 사람이 한성관 박씨였다. 대금을 모두 청산해 주는데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곳은 오히려 비웃기만 하는 얄미운 인심도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이때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이 제마음이 아닌것이 정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드디어 올날은 오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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