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2] 오스트리아의 한인동포 - 오스트리아에 온 가톨릭신부 장익 주교
[연재-2] 오스트리아의 한인동포 - 오스트리아에 온 가톨릭신부 장익 주교
  • 월드코리안
  • 승인 2012.11.02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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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한인사회를 구성한 사람들

이글은 오스트라아한인연합회가 최근 발행한 ‘오스트리아 속의 한국인’(출판사 리더스가이드)에 담긴 내용이다. ‘오스트리아...’에는 1930년대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한 한국인의 모습, 한인 2세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한국 음악계의 대부인 정진우, 신수정 교수, 안병영 전 교육부 장관, 김현욱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등 오스트리아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인 다양한 인물들도 소개돼 있다.<편집자주>

 
1933년 서울에서 출생한 장익 주교는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에서 5년을 유학했다.
“인스브루크 대학교에서 신학 석사과정을 밟았지요. 저가 처음 갔을 땐 인스브루크 대학교에 한국 사람이라곤 저 혼자 밖에 없었습니다. 52년부터 56년까지 미국 메리놀 대학에서 공부하고 나서, 배를 타고 혼자서 벨기에 루뱅 대학교에 철학 석사과정으로 유학을 갔지요. 루뱅 대학교가 그 당시 철학분야에서는 아주 유명했습니다. 루뱅에서의 철학 석사를 마치고, 59년부터 인스브루크 대학교 신학과를 다니게 되었지요. 당시 독일어권 신학계의 거성이었던 라너 형제, 융만 교수 등이 가르치셨지요.” 인스브루크 대학교는 오스트리아 황제가 설립한 대학교이지만, 신학과는 예수회에 겼다고 한다. 당시 이 대학 신학과에는 영국 등 유럽지역은 물론 미국 등 많은 나라에서 신학을 공부하러 올 정도로 매력이 있었다.

“카니시아눔(Canisianum)에서 기숙을 했습니다. 카니시아눔은 예수회 회원들이 운영하는 국제신학교 형태의 기숙사였지요. 여러 나라 학생들과 함께 살면서 공부는 인스브루크 대학교 신학교에 다녔습니다. 당시에는 오스트리아가 굉장히 가난했습니다. 2차 대전 패망(오스트리아는 독일에 합병되어 2차 세계대전을 함께 치루었음) 후 소련, 프랑스, 영국, 미국 등 4개국에 분할통치를 받다가 56년도에 독립을 했습니다. 대한민국은 48년에 끝났지만, 우리보다 훨씬 오랫동안 군정의 통치를 받은 셈이지요.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장학금을 줄 여력이 없었죠.”

그는 학비조달을 위해 여기저기를 알아보다 결국 한국과 인연이 있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주선으로 스위스의 한 성당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학비를 조달할 수 있었다.“오스트리아가톨릭부인회등에서도지원을하였지만, 인스브루크 신학생들에게는 해당이 없었지요.”

장익 주교는 인스브루크 대학교에서 1년여 동안을 공부하면서 이 대학의 여러 가지 여건이 신학을 공부하기에는 최고의 환경을 갖추었다고 판단하고, 카니시아눔 출신 동문들에게 장학기금 마련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반응은 뜻밖으로 컸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동문들이 동참하는 바람에 상당한 장학기금이 조성될 수 있었고, 이후 한국의 가톨릭 신학생 70여명이 인스브루크 대학교 신학과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제가 알기로는 한국 유학생이 1956년쯤엔 독일에 대략 30~40명, 프랑스에 약 50명, 오스트리아에 20명 미만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인스브루크에서 5년 정도 생활하니까 의대생 한 두 명과 신학생 등 10여명의 유학생들이 있었고, 오스트리아 전체 40~50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거의 혼자서 시작한 꼴이었지요. 학교에서도 ‘그 동양 아이’하면(저를 지칭한다는 것을) 다 알 정도였으니까요.”

장익 주교가 마련한 장학금으로 196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가톨릭 신학의 기틀을 잡은 주역들 대부분이 인스브루크 대학교 신학과 출신이었다. 그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교편과 연구 생활에 매진했다. 인스브루크 대학교 신학과 출신으로 세분의 주교가 탄생했다. 천주교 춘천교구장익 주교를 비롯해 마산교구 안영옥 주교, 부산교구 황철수 주교 등이다.

또 수원교구 최윤환 몬시뇰(전례학)은 서울가톨릭대학과 수원가톨릭대학 총장을 지냈으며, 서울교구 김병학 신부(성서학)도 서울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제주출신인 임승필 신부는 우리나라 성서학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는데, 인스브루크 대학교 신학과를 거쳐 로마 성서대학교로 가서 성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귀국 후 서울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우리말 성경 새 번역 사업을 거의 혼자서 주도하다시피 했다.

인스브루크 대학교의 신학 외 전공자로는 김영희 교수(한림대, 외대 약리학), 장초득 수녀(대구 파티마병원장) 등이 의과대학 출신이다. 파리와 빈에서 유학한 서인석 신부(전 서강대 총장), 서울가톨릭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임병헌 신부 등도 오스트리아 유학파들이다. “인스브루크 생활은 좋으면서도 너무 힘이 들었다는것과 모든 것이 새롭고 흥미로웠다고나 할까요.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늘 처음이자 혼자였고, 가는 곳 마다 언어도 달랐어요. 말도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 나라 저 나라 공부를 하러 갔으니,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미련한 짓을 사서 했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장익 주교는 장면 총리의 7남매 중 넷째다. 그의 집안은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대대로 가톨릭 집안이었다. 아버지인 장면 총리는 물론이고, 조부조모는 물론 증조부모님도 영세를 받았다. 어머니 김옥윤 여사와 외가 쪽도 거의 가톨릭 신자였다. 그러다 보니 어쩌면 어릴 때부터 보이지 않게 성직자의 길을 한걸음 한걸음씩 다가간 지도 모른다. 장익 주교는 사제의 길을 걷게 된 것을 미국에서 부터였다.

“경기중학교 5학년 때(학제가 개편되기 직전으로 현재로는 고등학교 2학년에 해당) 6·25사변이 일어났어요. 그때가 17살이었는데, 군대에 갈 나이는 아니었고, 물론 학교는 제대로 기능을 못했습니다. 동생을 데리고 이리저리 피난을 다녔는데, 부모님이 그때 미국에 계시기도 해서 하는 수 없이 동생과 함께 미국으로 가야 했습니다. 아무래도 어려서부터 생각하던 길을 가야겠기에 ‘메리놀회’에서 운영하는 신학교에‘손님학생’으로 들어갔지요. 처음에는 말이 안 통하니까 저 혼자 자습실에서 공부했습니다. 시작은 그렇게 했지요.”

1952년부터 1956년까지 그는 메리놀 대학을 다녔고, 학부과정에서는 주로 철학과 역사 등 인문학을 공부했다. 장익 주교의 누나가 수녀이고,그보다두살위인사촌형은미국에서사제의길을걷고있다. “사촌형은 베네딕도수도회 소속의 대학에서 법학을 마치고나서 수도회에 들어가 다시 철학, 신학을 공부한 뒤 회원이 되었죠. 그 뒤 사제생활을 하면서 컬럼비아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지요. 학위도 받았습니다.”

장익 주교의 부친은 한국에서 유명한 장면총리지만, 그는 정치할 의지가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너희들은 뭘 해도 좋다. 그러나 정치만은 하지 마라. 세상에 못할게 정치란다’라고 말씀 했습니다. 형제들 중에 아무도, 정치에는 나서지 않았고 저마다 자기가 원하는 분야에 가서 일했지요. 또한 두 분 다 자식들이 ‘어느 학교에 진학했으면 좋겠다’ ‘성적이 좋았으면 좋겠다’는 등의 말씀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고작 ‘뭘 하든 잘~해라’라는 정도의 말씀이 전부였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론 우리 부모님은 7남매를 키우면서 ‘학부형회’같은 곳에 한 번도 안 가셨습니다. 입학시험을 칠 때나, 졸업식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의 이 같은 모습이 야속하기도 했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철저하게 ‘자신의 책임 아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기 위해 그랬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되었습니다. 호랑이가 새끼를 키우듯 말입니다. 아마 그때 부모님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힘든 유학생활을 (남의 도움 없이) 저 혼자 해결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 당시 유학생들 대부분 그랬겠지만, 장익 주교의 유학생활은 남달랐다. “비싼나라에가서공부를하니당연히열심히해야죠. 내가 미국에 유학을 갔을 땐 많은 사람들이‘개척자’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하기 힘든 공부를 (유학을 와서) 하니까 하나라도 더 배워 가야겠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돈이 없다 보니 친구들도 못 만났습니다. 방학 때가 되면 당시 99달러를 내면 한 달 동안 미국 전역을 다닐 수 있는 그레이하운드라는 버스가 있었는데 그것이 가장 인기가 좋았습니다. 그 버스를 타면, (비싼 돈 들이지 않고) 친구나 친지를 만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등록금이 없다 보니 해마다 새로 타야 하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결사적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장익 주교는 1963년 3월 사제서품을 받고, 1967년 천주교 서울대교구교구장 비서를 시작으로 서울대교구와 대학(서강대학교, 가톨릭대학교)을 오가며 사제로서, 신학교수로서 봉직했다. 1970년 천주교 서울대교구 정릉동교회 주임사제, 1976년 천주교 서울대교구 공보실장, 비서실장 등을 역임했고, 1986년 천주교 사목연구원, 1988년부터 1994년까지는 서울 세종로교회 주임사제를 지냈다. 1978년부터 1985년까지는 교황청 종교간 대화 평의회 자문위원을 역임했다. 1980년부터 1982년까지는 이태리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철학박사과정을 밟았다. 그러던 그는 1994년 11월 11일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천주교 춘천교구 주교로 임명을 받은 뒤 2010년까지 16년간 춘천교구장으로 활동했다. 이와 함께 천주교 함흥교구장 서리도 겸임했으며, 2006년 10월부터 2008년까지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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