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대한민국-113] 책거리
[아! 대한민국-113] 책거리
  • 김정남<본지 고문>
  • 승인 2016.07.23 07: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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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남(본지 고문, 전 청와대 사회교육문화수석)
책거리는 책을 비롯해 도자기, 문방구 등 여러 기물(器物)을 그린 그림을 일컫는다. 책거리 중 책가(柵架- 서가)로만 구성된 그림이 책가도다. 책가도는 서양에도 있어 그 원조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개인 서재인 스투디올로(studiolo)로 알려져 있다.

정병모 경주대 교수에 의하면 책가도가 이탈리아→영국•프랑스→청나라를 거쳐 조선에 왔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와서는 독자적인 한국적인 그림으로 발전했다. 그러면서도 서양식의 원근법, 명암법 등이 반영돼 있어 입체적이면서 사실적이다. 그래서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글로벌한 장르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책거리가 한창 열풍처럼 퍼졌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 조선 제22대 정조(正祖,재위1752~1800)때 그랬다. 정조는 창덕궁 어좌 뒤에 있던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를 치우고 책거리 병풍을 세우라고 명할 정도로 책가도에 관심이 깊었다.

이는 그의 문예부흥에 대한 의지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왕이 책거리를 좋아하다 보니 고관대작들이 앞다투어 집에 책거리 병풍을 들였고, 책거리가 열풍처럼 대 유행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널리 퍼졌던 책거리는 19세기 후반에는 민중 속에서 유행했던 민화(民畵)의 단골 소재가 됐다. 상류층에서는 책거리에 중국도자기 등을 함께 진열해 그들의 골동취미를 드러냈고, 서민들은 책거리 민화를 통해 출세와 일생의 평안을 빌었다.

초창기 책가도에는 책이나 중국산 도자기뿐만 아니라 자명종 등 외국산 귀한 물건이 가득 진열돼 있다. 이는 오랫동안 세계와 단절되었던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과 서양 문물을 통해 세계를 들여다보려 했던 시대상황이 반영된 것이다. 또 신분제가 무너지는 혼돈 속에서 양반 또는 선비의 권위를 은근히 과시하고 싶은 심정이 표현된 것이 이 책거리다.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하고 있는 19세기 책거리 병풍 ‘호피장막도(虎皮帳幕圖)’를 보자. 표범 가죽이 휘장처럼 길게 드리워진 8폭 병풍으로 서안 뒤에는 펼쳐진 책과 안경이 놓였고, 주변엔 촛대, 향로, 공작 깃털 등 화려한 기물이 널려 있다.

청동 골동품과 장신구, 우아한 다기(茶器)로 보아 주인은 꽤 고상한 취미를 가진 선비인 것 같다. 이는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다. 표범 가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호피도’ 위에 누군가 일부를 뜯어내고 선비의 서재 풍경을 그려 넣었다. 장막 뒤엔 무엇이 더 있을까 궁금하게 만든다.

민화 풍의 그림 가운데 해외에서 외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장르가 책거리이다. 또 한국인의 정서와 평소의 인문과 독서 수준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 바로 이 책가도이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해군 견습사관으로 참여했던 주베르(zuber,1844~1909)가 7년 뒤 여행잡지 ‘세계일주’에 “조선과 같은 먼 극동의 나라에서 우리가 경탄해 마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주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도 책이 있다는 사실이며, 이것은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우리의 자존심마저 겸연쩍게 만든다”고 한 것처럼 문화민족으로서의 한국인의 긍지와 정서가 배어있는 것이 한국의 책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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