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만주㉕] 연길감옥 항일투쟁 기념비: 감옥의 족쇄를 부숴버리다
[아! 만주㉕] 연길감옥 항일투쟁 기념비: 감옥의 족쇄를 부숴버리다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승인 2022.09.13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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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삼성으로 불리는 중국 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가 곳곳에 있다. 의병운동,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지사들의 고민과 피가 어린 곳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 사적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 레코드판(1938년 제작). 오른쪽은 표지 뒷면 가사.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 레코드판(1938년 제작). 오른쪽은 표지 뒷면 가사.

1931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 7면에 ‘연길감옥에 전염병이 창궐: 면회하려 갓섯든 안해가 시체된 남변을 차저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내용인즉슨, 연변지구 화룡현(和龍縣)에서 오창묵(吳昌黙)이라는 젊은이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항일투쟁을 벌였다. 그러다 연길감옥(延吉監獄)에 투옥됐는데, 마침 감옥에 전염병(染病, 장티푸스)이 창궐하여 1주일간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앓다가 숨을 거두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른 체 그의 아내가 음식을 마련하여 면회를 왔던 차, 시체를 찾아가라는 당국의 통보를 받고 풀썩 주저앉아 3시간 동안 대성통곡했다. 주변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1938년 이시우(李時雨)가 작곡하고 김정구(金貞九)가 노래한 ‘눈물 젖은 두만강’의 창작 배경도 이와 유사하다. 1935년 어느 날, 작곡가 이시우가 두만강 유역의 한 여관에 묵었다. 그날 밤 이시우는 옆방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비통한 울음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이튿날 여관집 주인으로부터 사연을 전해 들었다. 즉 여인의 남편은 항일투사였다. 그러다 투옥됐는데, 모진 고문에 그만 숨을 거두었다. 그의 생일 하루 전날이었다. 여인은 남편의 생일에 맞춰 음식을 장만하여 면회를 신청했다. 하지만 싸늘한 주검을 마주해야 했다. 이에 이시우가 ‘여인의 비통한 울음소리’를 모티브로 ‘눈물 젖은 두만강’을 작곡했다. 

감옥에서 순국한 선열들을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들은 살이 찢기고 손발톱이 뽑혀 나가면서도 조국을 버리지 않았다. 신념을 지키는 것, 그것이 감옥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항쟁이었다. 그러나 전혀 예외적인 항쟁, 감옥의 족쇄를 부수고 집단으로 탈옥하는 항쟁도 있었다. 1933년 단옷날에 연길감옥에서 파옥투쟁(破獄鬪爭)이 벌어졌다. 두 차례의 실패를 딛고 일어선 극적인 성공이었다. 이때 300여 명이 탈옥했다. 그리고 49명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1936년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 제2군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여기서 죽나 저기서 죽나, 죽는 건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 

김훈, 두 차례 파옥투쟁을 벌이다가 익사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그러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滿洲省委員會)가 즉각 항일무장투쟁을 천명했다. 그러나 만주성위원회는 일제에 맞설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이에 당장은 ‘일제의 만주 점령을 반대하는 긴급 결의안’과 ‘농민운동 결의안’을 발표하여 유격활동과 농민운동을 독려했다. 예컨대 훈춘현위원회(琿春縣委員會)가 “중국인 지주와 한인 소작농의 모순 관계를 타파하자”라는 구호를 내세워 당해 추수투쟁(秋收鬪爭)과 이듬해 춘황투쟁(春荒鬪爭)을 전개했다. 그러자 한인들이 적극 호응했다. 이로써 연변지구에서 가장 먼저 항일유격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연길감옥(1930년대 촬영)
연길감옥(1930년대 촬영)

일제는 항일유격대를 진압했다. 수많은 항일투사를 사살하거나 체포했다. 그러자니 감옥이 필요했다. 언제까지 서대문형무소로 이송할 수는 없었다. 이에 1924년에 중화민국이 ‘길림성 제4 감옥’으로 건립한 연길감옥을 접수했다. 그러고는 명칭을 ‘연길모범감옥’으로 고쳐 운영했다. 여기서 ‘모범’이란 항일투사를 투옥, 고문, 교화하는 방법이 매우 잔혹했음을 의미한다. 일제는 연길감옥의 이러한 운영을 모범으로 상정하고, 길림, 돈화, 통화, 장춘감옥 등의 운영에도 접목하려 했던 것이다.

1930년대 초·중반, 일제는 1,000여 명에 달하는 항일투사를 연길감옥에 감금했다. 이 중에는 중국공산당 왕청현(汪淸縣) 초대 서기였던 김훈(金勳, 1904~1933)이 있었다. 김훈은 의란소학교(依蘭小學校), 대성중학교(大成中學)를 졸업하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2년간 유학했다. 이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왕청현위원회 건립을 주도했다. 그리고 왕청유격대를 조직하여 게릴라 작전을 지휘했다. 그러다 체포되어 연길감옥에 수감됐다. 김훈은 연길감옥에서 감옥위원회를 조직하여 파옥투쟁을 계획했다. 감옥위원회는 선전부, 감찰부, 군사부로 구성했고, 군사부 산하에는 무장대, 폭파대, 방화대, 탈취대 등 11개 분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김훈의 파옥투쟁은 변절자의 밀고로 두 차례나 실패했다. 일제는 김훈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그리하여 1933년 한겨울, 연길 부르하통하(布尔哈通河)에 하남다리(河南橋; 현 연길대교)를 건립할 때, 김훈을 얼음판에 밀어 넣어 익사시켰다. 또한 김훈과 함께 활동했던 감옥위원회 간부들도 하나둘씩 처단했다. 하지만 김훈의 영향력은 〈연길감옥가(延吉監獄歌)〉를 작사한 이진에게, 그리고 파옥투쟁을 계승한 김명주에게 미쳤다. 자신은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동지들이 유지를 이어받아 파옥투쟁을 성사시킨 것이었다.

이진, 노랫말로 파옥 의지를 돋우다가 병사

김훈을 제거했지만, 연길감옥의 간수들은 감옥위원회 같은 비밀 조직이 다시 결성될까, 늘 조바심을 냈다. 하여 재소자들이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한 달에 수차례씩 번갈아 가며 감방에 재소자들을 나눠 배치했다. 그럼에도 재소자들의 항쟁 열기는 식지 않았다. 이진(李進, 1906~1931)이 작사한 노래, 그가 모진 고문을 견디며 마지막 숨을 고를 때까지 불렀던 노래, ‘연길감옥가’를 부르며 파옥의 의지, 항일의 의지를 다졌기 때문이다. 
 

연길 부르하통하 하남다리(1930년대 촬영)
연길 부르하통하 하남다리(1930년대 촬영)

바람 세찬 남북 만주 광막한 들에 / 붉은 기에 폭탄 차고 싸우던 몸이
연길감옥 갇힌 뒤에 몸은 시들어도 / 혁명으로 끓는 피야 어찌 식으랴

간수놈의 볼멘소리 높아만 가고 / 때마다 먹는 밥은 수수밥이라
밤마다 새우잠에 그리운 꿈에 / 내 사람 여러 동지 안녕하신가

기다리던 면회기가 돌아오면 / 슬프도다 그물 속의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치는 눈물뿐일세 / 간수놈이 가라 하니 서러운 눈물

금전에 눈 어둡고 권리에 목맨 / 군벌들과 추수뱅이 아편쟁이들
꿈속의 잡소리로 무리한 판결 / 청춘을 옥중에서 시들게 한다

너희는 짐승같은 강도놈이다 / 우리는 평화사회 찾는 혁명군
정의의 총칼은 용서 없나니 / 정당히 판결하라 죄인이 누구냐를

팔다리에 족쇄 차고 자유 잃은 몸 / 너희놈들 호령에 굴복할소냐
오늘 비록 놈들에게 유린당하나 / 다음날엔 우리들이 사회의 주인

일제놈과 주구들아 안심 말어라 / 70만리 넓은 들에 적기 날리고
4억만의 항일 대중 돌격 소리에 / 열린다 감옥 문이 자유세계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지휘부(1939년)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지휘부(1939년)

이진은 왕청현 대감자(大坎子) 출신으로, 1930년 10월 왕청현 나자구(羅子溝)에서 조직한 왕청유격대의 창립 멤버였다. 왕청유격대는 30명으로 출발했으나, 별동대와 유격중대를 추가로 조직하며 규모를 확대해 나갔다. 이 무렵, 이진이 만주국 경찰서를 습격하다 체포되어 연길감옥에 투옥됐다. 그리고 연길감옥에서 김훈을 만났다. 이진은 김훈의 지도하에 감옥위원회 조직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김훈이 “감옥에서 몸은 시들지만 혁명 정신이야 어찌 시들겠소?”라고 한 말에 감명을 받아 ‘연길감옥가’ 1절을 작사했다. 

변절자의 밀고로 파옥투쟁의 주도자들이 고문을 당했다. 이진도 온갖 악형에 시달렸다. 그러다 ‘염병(染病)’으로 불리던 장질부사(腸窒扶斯; 장티푸스)에 걸려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25세였다. 이후 파옥에 성공한 연길감옥의 동지들이 김훈과 이진의 뜻을 기리고자 ‘연길감옥가’를 최종 7절로 완성했다. ‘연길감옥가’는 동북 일대의 항일투사들 사이에서 널리 전승됐다. 항일의 의지를 노랫말에 담았으며, 또 노래를 부르며 항일의 의지를 다져나갔다. 

김명주, 파옥에 성공하여 항일투사로 변신 

김명주(金明柱, 1912~1969)는 함경북도 명천군(明川郡) 출신으로, 어릴 적에 부모를 따라 길림성 연길현(延吉縣)으로 이주했다. 그런데 이 무렵 간도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1930년 5월 김명주는 연길현 풍흥동(豊興洞) 농민협회에 가담하여 소작쟁의를 벌였다. 그리고 얼마 후 중국공산당 청년단에 가입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청년단 대장이 김명주에게 석유를 사오라고 지시했다. 하필 그날 밤, 마을 류(劉) 씨 성 지주의 가옥과 낟가리에 불이 났다. 김명주는 졸지에 방화범으로 몰려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연길감옥에서 복역했다. 

김명주(金明柱, 연길감옥 탈옥결사대 총대장)
김명주(金明柱, 연길감옥 탈옥결사대 총대장)

1934년 여름, 연길감옥 재소자들이 하남다리(河南橋; 현 연길대교) 아래에서 하수 처리 노역을 했다. 이때 어느 일본 여인이 강변 떡집에서 기름떡(기름구이)을 샀다. 그런데 딸아이가 기름떡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이에 도로 주우려 하자, 일본 여인은 기름떡을 나무꼬챙이에 꿰어 재소자들에게 내던졌다. 재소자들은 자신들을 개, 돼지로 취급하는 일본 여인의 행위에 화가 났다. 이때 김명주가 나섰다. 김명주는 하수 처리장의 똥물을 삽으로 퍼 일본 여인에게 흩뿌렸다. 일본 여인은 삽시간에 오물을 뒤집어썼다. 

이 일로 ‘승냥이’라는 별명을 가진 리간수가, 노역 현장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며, 상부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리간수는 보복으로 김명주를 폭행했다. 김명주는 생사를 오갔다. 연길감옥의 재소자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무력행사를 할 수 없었다. 이에 세 가지 조건을 내걸고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첫째 김명주를 치료할 것, 둘째 리간수를 면직시킬 것, 셋째 위생환경을 개선하고 급식량을 늘릴 것이었다. 간수들은 ‘하루만 배를 곯으면 지쳐 그만두겠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김명주를 필두로 재소자들의 의지는 결연했다. 결국 연길감옥 당국이 세 가지 조건을 수용했다. 단식투쟁을 승리로 이끈 것이었다. 

1933년 겨울 김훈을 비롯하여 감옥위원회 간부들이 피살되었다. 그러나 감옥위원회의 명맥은 끊이지 않았다. 김명주가 이태근(李泰根), 이영춘(李英春) 등과 의기투합하여 탈옥지휘부를 새로이 설립했다. 그리고 숨죽여 때를 기다렸다. 그런데 1935년 초여름, 김명주가 우연히 간수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단오절(端午節)을 맞아 연길현 단위에서 큰 운동대회가 열리는데, 간수들 대부분이 운동대회를 참관할 것이며, 저녁에는 술판도 벌인다는 것이었다. 김명주는 때가 왔다고 직감했다. 
   

연길감옥 항일투쟁 기념비 전면(延吉市 河南街 16号 延边艺术剧场)
연길감옥 항일투쟁 기념비 전면(延吉市 河南街 16号 延边艺术剧场)

탈옥지휘부는 17명으로 탈옥결사대를 결성했다. 그리고 음력 5월 7일 15시경, 목조장(木造場)에서 숨겨 들여온 도끼로 족쇄를 부쉈다. 그리고는 삼노끈으로 묶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해놓았다. 그런데 왕(王)씨 성의 간수가 이를 눈치챘다. 결사대는 왕간수를 결박했다. 이어 몇몇 보초병을 처단하고 소총 50여 정과 수류탄 10여 개를 노획했다. 초를 다투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결사대는 자신들만 탈옥하지 않았다. 김명주는 모든 감방을 돌며 굳게 닫힌 문을 도끼로 열어젖혔다. 이 과정에서 감옥장 하승림을 사살했다. 결국 300여 명이 탈출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일본군이 부리나케 출동했다.

김명주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탈옥자들을 두 팀으로 나눴다. 한 팀은 자신이 인솔했고, 다른 한 팀은 이태근이 인솔케 했다. 김명주가 인솔한 팀은 모아산(帽兒山)을 넘을 때부터 일본군의 추격을 받았다. 3차례에 걸쳐 전투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김명주가 부상을 당했다. 탈옥지휘부를 함께 설립했던 이영춘은 즉사했다. 하지만 사선을 넘어 안도현(安图县) 차창자(車廠子) 항일근거지에 도착했다. 며칠 후 이태근이 인솔한 팀도 도착했다. 전체 인원은 49명이었다. 탈옥 당시 1/6에도 못 미치는 수치였다. 하지만 모두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1936년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 제2군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살고자 한 탈옥인가? 죽고자 한 탈옥인가?

‘탈옥’이란 죄수가 감옥으로부터 빠져나와 도망치는 것을 말한다. 지극히 불법적인 범죄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연길감옥에서 파옥투쟁을 벌인 재소자들은 죄수가 아니었다. 그들은 항일투쟁을 벌이다 감금되었고, 감금된 후에도 끊임없이 항일투쟁을 벌였다. 그들에게 탈옥이란 또 다른 형태의 항일투쟁이었다. 속죄하지도 않은 채 자유를 누리며 살기 위해 탈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투쟁하다가 죽기 위해 탈옥한 것이었다. 〈연길감옥가〉의 후반부 소절처럼, 그들은 팔다리에 족쇄를 차고 있었지만, 다음날에는 사회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며 감옥의 문을 열어젖혔다. 

연길감옥 항일투쟁 기념비 후면(延吉市 河南街 16号 延边艺术剧场)
연길감옥 항일투쟁 기념비 후면(延吉市 河南街 16号 延边艺术剧场)

그래서 내디딘 곳이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이었다. 예컨대 김명주는 제2군 6사에서 활동했다. 핵심 간부는 물론 병력 대부분이 한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연길(延吉), 화룡(和龍), 왕청(王淸), 훈춘(琿春)을 기반으로 백두산에 유격 근거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민족 해방’이라는 기치가 자신의 철학과 일치했다. 그래서 죽기로 싸워나갔다. 이듬해에는 무송현성전투(撫松縣城戰鬪)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이를 계기로 백두산 일대에서 일제를 무력화시켰으며, 국내진입작전을 수월하게 펼칠 수 있었다. 이후 동북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連軍)으로 개편되면서도, 민족의 범주를 떠나 한중연합군으로서 투쟁을 이어갔다. 

연길감옥 옛터는 연길시 하남로(河南路)와 장백로(長白路)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현재는 연변예술극장이 들어서 있다. 2000년 6월 김훈, 이진, 김명주 등 감옥위원회 후손들이 발의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정부가 후원하여 연길감옥 옛터에 ‘연길감옥 항일투쟁 기념비’를 건립했다. 기념비는 직사각형의 석조물 형태이다. 기념비 상단에는 파옥투쟁 당시의 모습을 부조(浮彫)로 새겼다. 뒷면 상단에는 파옥투쟁의 경과와 의미를 설명하는 비문을 새겼으며, 하단에는 ‘연길감옥가’ 1절을 새겼다. 현대적으로 건립한 예술극장과 아기자기하게 조성한 공원 사이에서 전체적으로 단아한 느낌이다.

기념비를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잦다. 연변지구의 조선족 단체를 중심으로 청명(淸明)을 기해 일종의 추모제를 거행하는가 하면, 항일투사의 흔적을 좇아 투쟁 정신을 계승하는 중국 학생들의 홍색교육장(紅色敎育場)이 펼쳐지기도 한다. 물론 이곳의 정체를 알고 있는 한국 관광객들도 아름아름 찾아들곤 한다. 우리는 이곳에서 고단하기 짝이 없었을 감옥에서의 노역과 학대, 그리고 파옥과 죽음을 불사하고 뛰어든 항일무장투쟁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스스로 개척하며 감수한 위대한 항일의 여정을 어렴풋이 상기할 수 있다.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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