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⑥] 이승만 대통령 망명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⑥] 이승만 대통령 망명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3.10.07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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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과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전쟁은 지진(地震)이고, 혁명은 홍수(洪水)”라는 말이 있다. 전쟁은 지진처럼 예고 없이 발생해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파괴해 버리는 데 반해, 홍수는 비도 오면서 시간을 두고 상황을 바꾸어간다고 보면, 4.19는 일종의 홍수였다. 홍수에 휩쓸린 고령의 이승만은 수습에 진력했다.

** 1960년 3.15부정선거 시위는 4.19혁명으로 이어지고, 그 정신은 부마민주화운동, 6월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꾸준하게 이어진다.[사진=경향신문]
1960년 3.15부정선거 시위는 4.19혁명으로 이어지고, 그 정신은 부마민주화운동, 6월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꾸준하게 이어진다.[사진=경향신문]

이 대통령은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국무위원의 사표도 수리했다. 또 이기붕도 부통령 당선자도 그 직에서 사퇴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는 성명을 4월 24일 발표했다. 대통령은 허정(許政) 외무(국무총리 제도가 없던 당시, 장면 부통령도 23일 사퇴했으므로, 외무장관이 수석국무위원이 됐다. 대통령은 이호 내무, 권승렬 법무장관을 4월 25일 임명했다. 그래도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4월 26일 하야했다.

그날 오후 국회는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했다. 국회는 3.15 선거의 무효와 재선거 실시, 과도정부 하에서 내각책임제 개헌, 개헌안 통과 후 민의원(국회) 해산과 총선거 실시 등을 결의하고, 수석국무위원(허정 외무)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면서 시국 수습에 전념하도록 했다.

그런데 과도정부가 구성된 날, 이기붕 일가 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허정(許政, 1896~1988) 과도정부 수반은 “조금 더 인내하지 못한 이기붕 씨가 야속스러웠다”고 술회했다. 그는 공산국가에서처럼 실권(失權)이 곧 죽음이라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민주국가로서의 우리나라의 체면에도 관계되는 일이라고 생각해 “사태가 가라앉아 이기붕에 대한 공정한 재판이 가능할 때까지만 그를 해외로 안전하게 피신시킬 생각이었다“고 회고했다. 이기붕의 호(號)는 만송(晩松)이다.

존경하는 이 박사를 충실히 모시는 것이 애국의 길이라고 굳게 믿던 소박한 만송을 화려한 정치무대에 내세우지 않고 착실히 뒤에서 이 박사를 돕도록 했더라면, 만송은 상당한 일을 해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사람 좋은 만송은 부인의 과욕과 주변 소인배들의 정치적 농간에 끌려다니다가 스스로 원하지도 않던 부통령 출마 를 하기에 이르러 비극의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 1979)

이기붕 일가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그날, “충격을 받은” 이승만 박사도 경무대(景武臺)를 떠나 이화장(梨花莊)으로 기어코 거처를 옮겼다.

이화장(梨花莊)은 이승만 박사가 거처하던 곳으로 종로 낙산 기슭에 있다. 이화장은 본채와 별채 등 여러 부속 건물로 돼 있으며, 1,450평 규모의 터에 자리하고 있다. 본래 이 일대는 배밭이 많았고, 조선 시대 이화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일제 때 헐렸다. 해방 후 이승만 박사는 오랜만에 귀국했으나, 거처할 가옥이 없어, 당시 실업가들이 동소문동에 돈암장을 마련해 주었으나, 11월부터는 이화장으로 옮겨서 거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중에도 이 집에 들러 산책을 하곤 했고, 1965년 7월 하와이에서 서거한 뒤 이화자에 며칠 안치됐다가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이 집은 1920년대에 건축됐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 대통령 서거 후 1970년 귀국해 이화장에 지내다가 1992년 영면에 들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장개석 타이완 총통이 1946년 한국을 방문하면서 가져온 냉장고를 35년간이나 사용했다.

이승만 박사가 한 달 가까이 이화장에서 보내던 5월 26일, 허정 수반(首班)을 만난 매카나기(Walter P. McConaughy, 1908~2000) 주한 미국대사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마담 리(프란체스카 여사)가 우리 집 사람에게 몇 번 전화를 걸기도 하고 찾아오 기도 했습니다. 요즈음 이 박사의 건강이 좋지않아 하와이로 휴양을 갔으면 좋겠 다고 마담 리가 말하더랍니다.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거 참 잘 됐습니다. 노경에 큰일을 당하셨으니 충격인들 오죽하겠습니까” 하고 곧 찬성의 뜻을 밝혔다. 나는 매카나기 대사에게 미 군용기를 제공해 줄 수 있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은 어렵고 하와이의 한인 교포들이 이미 전세 비행기를 얻어 놓았으니 그 점은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 정부에서 여권을 내어주면 자기는 곧 비자를 내주겠노라고 함축성 있는 말을 하고는 자리를 떴다. 나는 곧 이수영 외교부 차관을 불러 이 박사의 뜻을 확인하고 오라고 지시했다… 비행기의 정비가 끝나고 출발을 알리자, 이 박사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 하와이에서 잠시 쉬고 아이크가 오기 전에 돌아오겠오.” “염려 마시고 푹 쉬고 오십시오.” 이 말 외에는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 1979)

1960년 5월 29일 오전 김포공항. 이승만은 망명을 위해 하와이 교민들이 임차한 CAT 여객기에 오르기 직전 국민에게 한 말씀 남겨달라는 기자에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해, 다 이해해 주고 이대로 떠나게 해주어”라고 했고, 프란체스카 여사는 “그는 한국 국민을 존경하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5년 뒤(1965) 망명지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한다.[사진=경향신문]

85세인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에 도착한 뒤, 휴양 아닌 망명 생활에 들어갔다. 그가 하와이에 도착한 지 20일쯤 지난 6월 18일 그의 근황을 “하와이섬에 은둔하고 있는 이 전 대통령”(RHEE IN SECLUSION ON HAWAIIAN ISLE)이라는 제목으로 전한다.

한국의 이승만 전 대통령은 태평양이 내려다 보이는 작은 주택(a tiny cottage)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 그와 부인은 하와이에 있는 친구들이 초청해서 손님으로 지내고 있다. 이들 부부는 오아후섬의 조용한 지역에 있는 작은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 주택은 하와이에서 규모가 큰 조경업체와 요양원을 운영하는 한국인 윌버트 최의 소유이다. 최 씨 회사는 이곳 카네오헤와 호놀룰루에 지점을 두고 있다. 올해 86세인 한국의 전 대통령은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는 친구 대부분과 만남을 거부하고 있다. 이 전 대통령의 살림을 보조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박사 부부가 “의사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으며, 방해를 받으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묻는 친구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을 찾아왔던 한 방문객은 이들 부부가 발코니 의자에 앉아서 웃고 말하는 모습을 멀찍이서 봤다고 말했다. 이 박사 부부는 지난해 봄 한국의 총선에서 투표부정이 드러나면서 정부가 붕괴한 뒤 대통령을 사임하고 하와이에서 지내고 있다. 이 전 대통령은 자신의 출국이 “건강상의 이유”이며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해왔다. 이승만 박사는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항복하고 한국이 독립을 되찾을 때까지 50년간 해외에서 망명 생활 을 했고, 그 가운데 반 정도인 25년을 하와이에서 보냈다.(카네오헤, 하와이, 1960년 6월 16일자)

이승만 전 대통령은 떠날 때 이야기처럼 6월(1960.6.19~21) ‘아이크’(Ike: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애칭)가 한국을 방문하기 전에도 돌아가지 못했다. 아니 그는 살아서는 돌아가지 못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34대 대통령, 재임 1953.1~1961.1) 미 대통령은 1960년 6월 19일부터 21일까지 2박 3일간 한국을 방문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한국방문은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뒤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으로, 당시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거리에 나서서 그의 방문을 환영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말한 내용은 당시 계획돼 있던 아이젠하워의 이 방문을 말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미국 중앙정보국(CIA)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불러 “미국 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러, 이 박사가 돌아오시겠다고 하면 정중히 모셔라”고 그의 귀국을 추진해보라고 지시했다. 1962년 11월이었다. 이승만 박사가 서울을 떠난 지 2년 6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김종필은 호놀룰루 동쪽 산기슭에 있는 요양원으로 이 박사를 찾아갔다. 이 박사는 이틀 전 “서울로 간다”며 병상에서 무리하게 일어서다가 넘어지면서 골절상을 입은 처지였다.

나는 이 대통령의 얼굴을 한참 동안 지켜봤다.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이 아픔을 참 느라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참을 서 있다 호주머니에서 현금 2만 달러를 꺼냈다. 서울을 떠나기 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챙겨준 돈이었다. 그는 “이거 열 배를 해 드려도 모자랄 텐데 아쉬우나마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가져다 드려라”고 내게 지시했다. 그때 2만 달러는 한국에서는 대통령이나 만질 수 있는 큰 금액이었다. 돈을 받아 든 프란체스카 여사가 울먹이다가 눈물을 터뜨렸다. 새까만 눈이 아닌 새파랗고 큰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그때 처음 봤다. 가슴이 아팠다. 아직도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김종필, 『김종필증언록』, 와이즈베리, 2016)

프란체스카(1900~1992)는 1933년 스위스 제네바의 한 식당에서 “기품있는” 동양의 신사와 합석을 하는 우연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그녀는 33세, 그는 58세였다. 이들은 1934년 결혼했다. 그녀는 그 뒤 평생을 이승만의 동지와 비서로 함께했다.

그날 요양원장은 “지금 비행기를 타면 그 자리에서 돌아가신다. 앞으로도 상당 기간 여기 누워 있어야 한다”고 했다. 숙소로 돌아와 박 의장에게 그 상황을 보고하자,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박 의장은 “그렇게 위독한가. 어쨌든 잘 모셔라. 내가 이 박사를 꼭 환국하게 해드리겠다고 전해라”고 당부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65년 7월 19일,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하와이에서 서거했다. 병상에서도 정신이 들 때면 “내가 여기 왜 있어. 서울 가. 서울에 갈 거야”라면서 병상 침대에서 떨어지기를 여러 번, 그는 끝내 살아서 환국하지 못했다.

서거 나흘 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유해를 실은 미군 수송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박정희 제5대 대통령은 이효상 국회의장, 조진만 대법원장, 정일권 국무총리 등 3부 요인을 대동하고 공항에 나가 이승만 박사의 유해를 영접했다.

국립묘지에서 열린 안장식에서(7.27) 박 대통령은 그를 “조국 독립운동의 원훈(元勳)이요, 초대 건국대통령”이라고 추모하면서 “여기 여러 사정으로 말미암아 박사로 하여금 그토록 오매불망하시던 고국 땅에서 임종하실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드리지 못하고 이역의 쓸쓸한 海濱(해빈)에서 고독하게 최후를 마치게 한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바입니다”라고 정중하게 호칭하고 마음 깊이 사과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이승만을 “독립운동의 원훈이요 초대 건국대통령”이라고 호칭했다. 동작동 국립현충원은 6.25 전쟁의 전사자를 위해 1953년에 위치가 결정돼 조성됐다. 1965.7.27

제1공화국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 3.15부정선거 관련자들은 재판에 회부됐으며, 이 재판을 이어받은 5.16군사정권 혁명재판소는 9월에서 11월 사이 재판절차를 끝냈다. 이 재판이 다 끝나고 1961년 12월 21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사형 선고를 받은 한희석과 유지광을 무기징역으로 감형 조치하고, 전 내무장관 최인규(1919~1961), 정치깡패 임화수(본명 권중각, 1921~1961), 전 경무대 경찰서장으로 대통령 경호실장을 겸하던 곽영주(1924~1961)에 대해서는 사형집행을 재가했다. 그들은 재가 직후 사형집행대에 올랐다.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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