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⑦] 민주당 장면 정부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⑦] 민주당 장면 정부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3.10.14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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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과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제1공화국이 4.19로 무너졌다고 하지만, 법적으로는 허정(許政)을 중심으로 과도내각(過渡內閣)이 구성돼, 1공화국과 2공화국을 이어준다. 새 헌법(3차 개헌)은 ‘내각책임제’와 ‘국회 양원제’(兩院制)를 채택했다(6.15). 헌법은 개정됐지만, 선거가 실시되지 않아, 이 공백을 막기위해 새 헌법은 부칙에 수석국무위원이 총리를 맡도록 규정해 놓았다. 당시 허정은 잠깐이지만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외무부장관, 이 세 직책을 겸하고 있었다. 허정 회고록에 함께 실린 그에 대한 인물평의 한 부분이다. 우양(友洋)은 그의 호(號)다.

우양(友洋)은 시키면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라도 되겠지만, 스스로는 군수 자리 하나 얻어 하지 못할 인물이라는 평을 하는 이가 있었다… 내가 아는 정치가 중우양 선생과의 비교로 얼른 생각나는 이는 미국의 고(故) 트루먼 대통령이다. 성격과 자기의사의 표시를 정직하고 용기있게 하는 점에서 특히 비슷하다.(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 1979)

새 헌법에 따라, 1958년에 구성된 국회는 해산되고, 1960년 7월 29일 새로운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된다. 제5대 민의원(국회의원) 선거와 제1대 참의원 선거다.

3.15와 4.19는 나라에는 재앙이었으나, 낙선하고 새로운 기회를 기다리던 김대중(36세)에게는 ‘2년이나 일찍 찾아온 기회’가 된다. 김대중은 인제에서 다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다. 자유당(自由黨)은 된서리를 맞았지만, 민주당(民主黨)은 국민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민주당 공천만 받으면 막대기만 꽂아도 열매를 맺는다”라는 말이 유행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1960년 인제에 다시 막대기를 꽂았으나, 안타깝게도 열매는 커녕 꽃도 피우지 못했다. 선거법이 개정되면서 부재자투표 제도가 도입된 것이 패배의 원인이 됐다. 인제는 한 해 전 보궐선거 당시 41,000명이던 유권자가 20,000명으로 줄어들면서, 김대중을 지지하던 젊은 군인들의 표가 사라졌다. 새로 도입된 부재자투표제에 따라 군인들이 각자 고향의 지역구 후보에게 투표했기 때문이다.

새 선거법은 민주당 신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보선과 유진산을 중심으로 한 구파가 자유당 세력과 ‘야합해서’(김대중 자서전) 통과시켰다. 철원, 고성, 인제, 양구 등 전방 수복지역 지역구에는 신파 후보만 출마했고 구파 출신 후보자가 없다는 계산 아래 법 개정에 동의를 해 주었기 때문이다. 같은 당이라고 해도, 파벌이 다르면 무섭다. 애정 없는 부부가 상대방에게 해코지하는 듯했다.

4·19 이후여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뒀지만, 김대중은 낙선했다. 민주당은 하원인 민의원(民議院) 233석 가운데 175석을, 상원에 해당하는 참의원(參議院)에서는 58석 가운데 31석을 차지했다. 양원 합동회의는 민주당 구파의 윤보선을 제4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고(8,12), 곡절 끝에 신파인 장면을 국무총리로 인준했다(8.19).

이승만(1~3대 대통령) 장면(2,7대 국무총리) 윤보선(4대 대통령)

많은 소란과 혼란이 있었지만, 61년으로 해가 넘어가면서 장면 정부는 차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민주당 장면 정권이 출범하고 5.16쿠데타로 무너지기까지의 9개월 동안 하루 평균 3회, 모두 1,036회의 시위가 발생했다고 경찰은 집계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이 반공(反共)으로 동이 터서 반공으로 저무는 시대였다면, 장면 시대는 시위로 동이 트고 시위로 저무는 시대였다. 초등학생부터 경찰관에 이르기까지 연령 직업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

장 총리는 6월 미국을 방문해 케네디 대통령과의 회담도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정쟁(政爭), 특히 집권 민주당 내의 신파·구파 간의 파벌싸움은 국민들을 크게 실망시켰고, 군인들이 쿠데타를 계획하는 빌미로도 작용한다.

민주당 내 신·구파의 갈등은 창당 때부터 있었으나, 반(反)독재라는 구호에 묻혀있다가, 여당이 돼 권력 분배가 현실로 대두되자 마구 터져 나왔다. 항간에서는 장면 정권이 ‘3신’(新) 또는 ‘4신’ 때문에 망할 것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3신’은 민주당 내 구파가 떨어져 나가 창당한 신민당(新民黨, 창당은 1961년 2월이지만, 60년 여름부터 별도로 행동하다가, 5·16 이후 소멸)과 신문 그리고 혁신계(革新系)를 말하고, ‘4신’은 ‘3신’에다 민주당 내 소장파로 구성된 모임인 신풍회(新風會, 출범 1961.1.26.)를 말한다.

집권 민주당 내 신파(장면 총리), 구파(윤보선 대통령) 간의 다툼은 온 나라를 소란스럽게 하고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았다. 민주당 구파는 의원 86명으로 ‘민주당 구파 동지회‘라는 이름으로 별도의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고 별도로 장관직을 요구해 5명이 입각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장면 정권은 민주당 신파, 구파의 연립 내각인 셈이었다. 구파는 당(대변인 김대중)과 별도의 대변인을 내세워 몽니를 부리고 정부를 비판했다. 그러던 구파는 1960년 말 민주당을 집단 탈당해 신민당을 창당했다(1961.2.20.). 구파는 완전히 별도의 야당이 됐다.

언론도 자유당 독재정권의 족쇄에서 풀려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유를 정부 공격에 쏟아 부었다. 당시 언론은 신생 민주당 정부를 독재정권처럼 대했다.

혁신계도 모처럼 얻은 정치적 자유를 무한대로 이용했다. 혁신세력은 ‘국제적 보장 하의 영세적 중립화 통일’ ‘선 통일, 후 중립화’ ‘남북 군대의 무장해제와 외국군 철수’ 등 무책임한 남북통일정책을 주장했다. 게다가 신풍회는 근거도 없이 장면 정부가 ‘텅스텐수출계약사건’(중석불 사건)을 통해 정치자금을 마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장면 총리는 인간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대차지 못했다. 그런 점이 혼란기 지도자로서는 흠이었다. 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굳건한 신념은 흔들림이 없었다”고 평했다. 신파 김대중은 구파 윤보선 대통령을 이렇게 비판했다.

신민당 간부회의를 대통령 관저에서 열기도 했다. 신민당은 민주당으로부터 정권을 뺏을 궁리만 했다. 윤 대통령은 분쟁을 조정하고 의견을 조율해 주는 어른다 운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다. 대통령의 집무실이 정쟁과 갈등의 진원지였다. 국가원수의 권위와 체통을 스스로 박차 버렸다. 자연 정국은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김대중, 『김대중자서전』, 삼인, 2015)

대통령 윤보선도 신파의 리더인 장면 총리를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회고록 곳곳에서 신파의 독주와 미숙함에 대한 비판을 숨기지 않았다.

장면 내각은 그토록 갈팡질팡했다. 물론 외적인 영향이 크게 작용한 탓도 있었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장면 총리의 지도력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지배적이었다.측근 참모들의 제언을 소신껏 받아들이거나 물리칠 수 있는 결단성이 부족하여 리더십이 약하다는 평이었고, 낙관적인 탓인지는 몰라도 그저 적당히 하면 되겠지 하는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자세여서 스스로 곤경에 처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 다.(윤보선, 『외로운 선택의 나날』, 동아일보사, 1991)

그러나 과도정부를 맡았던 허정은 윤보선 대통령의 과욕을 비난했다. 당시 민주당 구파는 대통령 윤보선, 총리 김도연을 고집하고 있었고, 신파는 대통령 윤보선, 총리 장면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윤보선은 대통령으로 선출됐지만, 총리 선출은 시간을 끌고 있었다. 허정의 증언이다.

나는 윤 대통령에게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모두 구파가 차지하려고 하는 것은 과욕이라고 지적하면서 윤 대통령에게 물었다. “누구를 지명하겠는가?” 그는 대답을 망설였다. 나는 민의원 의장에는 중도파인 곽상훈 씨가 당선되었고, 대통령은 구파에서 나왔으므로, 대통령으로서 파벌을 초월해 신파의 장면 씨를 총리로 지명하는 것이 정치 도의에 맞는 일이라고 윤 대통령게게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웃으며말했다. “장면씨는 안돼. 당내 공기도 그렇고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 1979)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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