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⑰] 한일 국교정상화와 미국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⑰] 한일 국교정상화와 미국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3.12.30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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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과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해외 인력 송출은 국민들의 열띤 호응 속에 잘 진행됐지만, 나머지 한-일 국교정상화와 베트남(월남)파병은 극히 민감한 문제였다. 우선 국민들의 반대가 극심했다. 민족의 자존심, 명분 없는 전쟁 지원이라는 어려운 장애물을 돌파해야 했다. 군사정부로서는 자본 확보에 가장 확실한 방안으로 생각하지만, 국민들로서는 가장 반대하는 두 가지 정책, 고민이 많았다.

한일회담에 임하는 내 마음은 1961년 혁명 때 목숨을 걸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내게는 제2의 혁명이었다.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 그 일을 수행하는 게 혁명의 기획자이자 중앙정보부장이었던 내가 할 일이었다. 10년간 교착상태에 빠진데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게 한일국교정 상화 교섭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혁명 과업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일이었다. 조국 근대화의 자금 밑천을 만들어야했다.(김종필, 『김종필증언록』, 와이즈베리, 2016)

한일회담이 마무리되는 그때는 해방 20년,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일제의 악독한 식민통치의 아품과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식민지배에 대한 정중한 사과와 배상을 받아도 시원찮은데, 사과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경제원조’형식의 돈을 받고 성급하게 이루어지는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한 학생과 시민, 야당의 반대는 격렬했다.

김종필의 증언록을 보면 5.16쿠데타 이후 미국을 방문하는 길에 만난 한일 정상(박정희-이케다, 1961.11.12.)은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에 속도를 내기로 했지만, 실제는 지지부진했다.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핵심은 청구권(請求權) 자금의 규모가 문제였다. 그래서 이 매듭을 풀어야 한-일 국교정상회담이 진전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돈도 돈이지만, 미국도 이 회담의 촉진을 매우 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의 미국 방문 전에(1961.10) 박정희와 김종필은 민주당 시절 제5차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활동했던 유진오 박사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로 초청해 의견을 청취했다. “일본이 우리에게 정말 얼마를 줄 수 있다고 보느냐”는 박 의장의 질문에, 유 박사는 “3,000만 달러 이상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박 의장은 “어떤 사람은 일본 지배 1년에 1억 달러씩 36억 달러를 받아내야 한다고 말하고, 또 최소 10억 달러는 받아야한다고 말하고… 김 부장, 8억, 8억 달러는 어때? 국민들은 불만이겠지만 그걸로 종합제철소 짓고 종합기계공장도 만들고 해보자고”고 말했다. 이 액수는 박 의장의 지침이 되고, 김종필은 일본과의 막후 협상(오히라 외상)에서 ‘무상 3억, 유상 2억, 민간 1억+α’로 합의를 이룬다. 오히라와 3시간 이상 대좌를 한 뒤의 결과였다. 김종필은 “당시 일본도 전후 복구 사업으로 재정이 어려웠고 외환보유액도 14억 달러에 불과했다”고 증언록에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액수의 결정에는 미국도 개입해, 일본 측에 압력을 가했다.

최종 타결을 앞둔 1964년 3월, 일본과 한국에서 대학생들의 반대 시위가 극심했다.

나는 한참 그들의 주장을 듣다 버럭 소리를 지르며 “너희들은 나더러 매국노라고 떠드는데 조국을 사랑한다면서 모국어도 몰라 일본어로 내게 항의하느냐”고 일갈했다. 나는 이어 “조국이 얼마나 가난하게 사는지 너희들은 잘 모른다. 원한다면 내일이라도 들어와서 보고 느끼게 만들어 주마. 너희와 나는 입장이 다르다. 나는 조국 근대화를 위해 혁명을 했다. 그 일원으로서 책임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다. 어떻게 해야 내 조국이 극빈 상태를 탈피하고 세계무대로 뛰어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렇게 몸부림치고 있는 거다.”(3.25, 도쿄 힐튼호텔, 조총련계 대학생)

2주일 뒤 김종필은 다시 서울에서 학생들을 만나 설득한다. 자신의 후배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생들이었다. 당시 김종필 증언록의 내용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생각해봐라. 서쪽에는 중공이, 북쪽에는 소련이 막아서 대륙으로는 갈 데가 없다. 그들은 막대한 국력을 가진 공산국가다. 그쪽으로 는 우리가 나아갈 수 없다. 이처럼 우리는 대륙의 끝에 맹장처럼 매달려 있는 신 세가 아니냐. 남쪽은 3,000km 이상의 섬들이 늘어서 있다. 일본 제도(諸島)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일본을 디딤돌로 해서 태평양으로, 인도양으로, 지중해로 나가야 한다. 일본이 밉더라도 우리가 살길을 열어가려면 국교를 정상화해야 한다. 일본으로부터 청구권 돈을 빨리 가져다가 경제개발의 밑천으로 삼아야한다. 이게 안 된다면 우리 민족은 정말 쓸모없는 맹장 신세로 끝나고 만다.(4.9, 서울 사대강당, 대학생 3,000여 명)

당시 김종필이나 정부는 절박했다. 설득이 곧 절규였다. 그의 모든 발언과 행동은 박정희를 대리한 것이었다. 가난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설득이 됐고, 가난을 경험했더라도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 설득이 쉽게 통하지 않았다.

김종필은 박정희의 조카사위였다. 군 하극상 사건으로 1961년 2월 예비역으로 편입된다.

한일회담에서 미국의 역할

이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한-일회담이 한국과 일본 두 나라 만의 회담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최강자가 한·일 두 나라에 엄청난 압박을 가해 성사된 회담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한국 정부에게 있어 한일회담 타결에 적극 나서지 않을 경우 경제원조를 동결 또는 삭감할 것이라는 미국의 단호한 경고는 무엇보다 두려운 ‘채찍’이었다. 실제로 미국의 원조 규모는 1957년 정점을 찍고 1960년까지 크게 삭감했는데, 같은 기간 경제성장률 역시 1957년의 8.1%에서 1960년 2.3%로 크게 하락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본의 자금과 기술마저 없다면 경제성장을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획득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함을 실감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미국이 권유하는 대로 대미의존형 경제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자립형 경제개발을 추진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한일협정을 조기에 타결해야 한다는 동기를 갖게 되었다.(조아라, “한일회담 과정에서의 미국의 역할, 케네디정권기 청구권교섭을 중심으로”, 일본비평 10호)

이렇게 내몰리다시피 한 협상에서 우리가 제대로 우위를 지키기는 아주 어려웠다. 당연히 학생과 야당, 시민들의 불만과 항의가 빗발친다. 1951년부터 시작된 한일회담이 막바지로 향하는 1964년 6월 3일은 이 불만이 정점을 향해 치솟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서울 시내 18개 대학 15,000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한-일회담 반대”를 외쳤다. 선택은 둘 중의 하나였다. 협정의 강행이냐, 포기냐? 포기는 혁명(쿠데타)의 실패요, 대통령의 하야를 의미했다. 박정희는 그날 저녁 서울 지역에 비상계엄령(非常戒嚴令)을 선포한다(1964.6.3.~7.29).

“(한일회담 당시)박 대통령은 정권을 내놓고 대통령직에서 하야할 결심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6월 3일 미국의 버거 대사와 유엔 군사령관이 헬기를 타고 청와대를 방문했다. (헬기를 탄 것은 당시) 데모대에 길이 막혀 차를 타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의기소침해 있던 박 대통령을 격려하고 사태수습을 함께 논의했다. 그리고 오후 8시, 드디어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김대중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

당시 미국은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이어지고 있어도 이를 크게 우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4월 혁명 때는 학생들의 시위에 대한 시민들의 호응이 컸는데 비해,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는 학생들만 나서고 시민들의 반응이 약한 것을 보고, “대중의 지원 없이는 학생들이 성공할 가능성은 없다”라고 정보보고서를 내고, 박 대통령에게도 회담의 체결을 밀고 나가라고 충고했다. )임영태 정창현, 『새로 쓴 한국현대사』, 역사인, 2017)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 1964년.

일본이 한일회담에 임하면서도 때로는 적반하장식 태도를 보이고 뻣뻣하게 나온 근본 원인 가운데 하나는 당시의 세계정세와 미국의 전후처리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지적된다. 미국은 태평양전쟁 전후처리 과정에서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의 책임과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았다.

한일국교정상화회담(한일회담)은 미국의 강력한 권고로 1951년 10월부터 시작됐다. 1965년 6월 타결될 때까지 14년 동안 1,200여 회의 본회담과 부속 회담이 열린, 외교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마라톤회담이었다. 회담의 주요 쟁점은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대일청구권, 동해상의 어업권(이승만 라인 철폐) 등이었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후 처리에서 발생한 약 22억 달러의 피해를 일본에 청구했지만, 일본은 그 근거를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이 전쟁에서 지고 한국에서 빠져나갈 때 남겨둔 재산에 대해 청구권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양국의 대립은 1953년 10월의 제3차 회담에서 최악의 상황을 보인다. 당시 일본 측 대표 구보다(久保田貫一郞)는 일본의 한국 지배는 유익한 것이었으며 한국은 일본이 아니더라도 중국이나 러시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구보다 망언). 이 망언으로 인해 회담이 오랫동안 중단됐으며, 일본은 1957년 이 망언을 취소하고, 한국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했다. 어렵게 열린 4차 회담은 일본 정부가 재일교포 북송으로 또 일시 중단된다. 그 뒤 정면 정부도 한일회담에 열의를 보였지만, 정권이 단명으로 그치는 바람에 진전을 이루지 못했고, 516쿠데타 이후 회담이 다시 본격 진행됐다.

당시 선진국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賠償:남에게 손해를 물어 줌)의 개념이 거의 없었다. 도조 히데키(東條英機,1941~1944 총리 역임) 전범(戰犯) 내각의 일원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1957~1960 총리 역임) 같은 정치인이 2차례나 총리를 지내면서 전후 일본의 체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또 하나 독일과 달리 일본은 자신들의 전쟁범죄에 대해 정확한 반성을 할 현실적인 필요를 충분히 느끼지 못했다. 전후 처리 과정을 통해 독일은 피해국이 “이제 됐다”고 할 때까지 충분한 사과를 하는 점잖은 나라로 변모했지만, 일본은 자신들이 일으킨 침략전쟁으로 인한 피해에 책임을 지고 사과하는 대신, 자신들이 원자폭탄에 의해 피해를 받은 나라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 2차 대전 이후 새로운 세계질서를 세우는 과정에서 불가피했다고 하지만, 미국의 책임이 적지 않다.

1948년 말 무렵은 미국-소련 사이엔 동서냉전의 갈등이 커가던 시점이었다. 워싱턴의 트루먼 행정부와 맥아더 사령부는 전범 처벌로 일본 보수 본류의 반감을 사기보다는, 사면(赦免)으로 그들의 환심과 협조를 얻고, 미·일 유착을 다지는 것이 미국에게 더 이롭다는 판단을 내렸다. 뒤이은 6.25 한국전쟁은 일본 전범 처리에 관한 관심을 아예 사라지게 만들었다… 히로히토를 비롯한 주요 전범자들이 처벌을 비껴간 결과는 전후 일본에 심각한 문제점을 낳았다. 무엇보다 히로히토가 ‘천황’ 자리에 그냥 머무는 것을 본 일본인들은 전쟁범죄에 대한 공범 의식을 덜 느끼게 됐다. “국왕이 전쟁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우리도 책임이 없다”는 분위기가 퍼져갔다.(김재명,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선물:, 프레시안, 2023.2.18.)

어려웠던 절차가 끝나자 박정희는 특별담화를 발표한다(6.23). 그는 한국 내에 만연한 패배주의적인 시각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소신을 강한 어투로 표현했다.

나는 국민 일부 중에 한일 교섭의 결과가 굴욕적이니 저자세니 또는 군사적·경제적 침략을 자초한다는 등 비난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매국적이라고까지 극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묻고 싶습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일본이라면 무조건 겁을 집어먹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비굴한 생각, 이것이야말로 바로 굴욕적인 자세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일본 사람하고 맞서면 언제든지 우리가 먹힌다는 이 열등의식부터 우리는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한일국교정상화가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느냐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느냐 하는 관건은 우리의 주체의식이 어느 정도 건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김종필, 『김종필증언록』, 와이즈베리, 2016)

1964년 중 고조됐던 긴장은 65년 들어서도 계속되면서, 남은 절차의 진행이 이어진다. 2월 서울에서 한일기본조약 가조인(假調印)이 있었다. 시이나(椎名) 일본 외상이 도착성명을 통해 “불행한 과거를 깊이 반성한다”고 과거사에 대해 기대 이상의 강도로 사과했음에도,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 분위기는 쉬 사그라지지 않았다. 6월 도쿄에서 조인식이 있었고, 8월 비준안이 우리 국회에서 통과되고, 일본에서는 12월 참의원에서 통과돼, 절차가 다 끝났다.

한-일기본조약 조인식은 1965년 6월 22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진행됐다. 한국 측에서는 이동원 외무부 장관이 참석했다. 회담 시작 14년만이었다.

이 무렵, NYT 오피니언 난에는 ‘한국인들의 조약공포증’(Koreans’ Fear of Treaty)라는 독자 투고가 실렸다. 한국민들이 한일국교정상화회담에 저렇게 반대하는, 속 깊은 이유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국민들의 조약 공포증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얼마 전 결론이 난 두 나라 간의 국교 ‘정상화’ 조약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는 한국과 많은 신생 후진국들의 정치적 불안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연례 의식’이라는 꼬리표보다는 약간의 이해와 분석이 필요하다.

학생들의 항의 시위가 약간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표출되기는 했지만 많은 한국민들의 눈에는 이 조약이 ‘정상적’이지 않게 보인다. 왜냐하면 일본은 1910년에 한국과 강제로 조약을 맺어 식민지로 삼았을 때, 두 나라 사이의 모든 정상적인 것을 ‘비정상화 시켰기’ 때문이다.

한국의 학생과 야당들은 최근 한국 국회에서 비준된 한일국교정상화조약(한일협정) 이 일본 침략의 피해자인 한국의 입장에서 너무 많이 양보한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이 한일협정에서 더 나은 조건을 얻을 수 있었는지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시위 학생들은 미국이 강력한 압력을 가해 한국이 그 조약을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의구심을 품고 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 아시아의 두 반공주의 국가가 과거의 잘잘못을 잊고, 점증하는 공산주의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해 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아마 시위 학생들은 1883년 한미 두 나라는 어느 한 나라가 제3국의 침략을 받을 경우 도움을 주도록 약속한 한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지만, 몇 년 뒤 미국은 일본과 비밀협정을 맺어, 일본은 당시 미국의 식민지인 필리핀을 침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주고, 그 대신 미국은 일본의 한국 침략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한국민들이 이러한 역사의 반복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학생들의 비평화적인 시위행위를 개탄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지 그 원인을 이해하는 일일 것이다.

벤자민 민(Benjamin H. Min)

뉴욕주립대 버팔로 캠퍼스, 조교수,

1965.8.27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한-일 국교정상화는 강대국이자 최대 지원국인 미국의 경고와 압력 그리고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한일 두 나라 정부 등 3자의 합작품이었다. 우리 국민도 필요성을 인정해, 14년간의 협상을 거쳐 타결됐지만, 아직 역사의 쟁점이 돼, “불가피 했고 시의적절한 결단이었다” “매국적이고 미흡했다”라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한-일 협정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습니다. 침탈한 나라와 침탈당한 나라가 국교를 정상화하려면 침탈한 나라의 진정한 사과와 반성이 우선이라는 것이 인류 보편적 양심에 기반한 상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를 줄 거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면 되겠어?’라는 대답이 돌아온 것입니다. 청구권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로 합의됩니다. 그것도 보상이나 배상이 아닌 독립 축하금이라는 명목입니다. 도저히 선열들께 고개를 들 수 없으며, 후손들에게 영원히 부끄러운 뿐입니다.(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2022.1.31, 한겨레)

한일회담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도 편이 갈릴 것이다. 이 복잡한 사안에 대한 관련자들의 진술이나 연구는 계속 이어질 것이고, 여기에 민족감정, 정치적 진영이라는 시대적 갈등 요소들까지 가세하면 평가에 따른 논란은 오랫동안 계속될 수도 있다.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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