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⑳] NYT “한국 대선, 안정을 택하다”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⑳] NYT “한국 대선, 안정을 택하다”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4.01.20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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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과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1967년 대선에서는 동서(東西)로 표가 갈리는 ‘동여서야’(東與西野) 현상이 나타났다. 태백산맥(太白山脈)을 기준으로 동쪽에 해당하는 부산, 대구와 경상남북도에서 박정희에 대한 지지세가 높아졌고, 태백산맥과 가까운 강원도와 충청북도도 여당에 유리한 득표 결과가 나왔다. 반면에 전라남북도가 야당으로 돌아섰다.

윤보선은 서울, 경기, 충남, 전남, 전북에서 우세한 결과를 보였다. 사실 우리나라 최초의 보수정당인 한국민주당(한민당)의 본산이라고 할 만한 전라남북도가 야당 지지로 돌아선 점이 특이하다면 특이한 결과로 기록된다. 1963년 대선에서는 그러지 않았지만, 67년 대선에서 호남(湖南)은 박정희에게서 떠나고 있었다. 다음 대선(1971년 제7대 대선)에서 호남은 박정희로부터 더욱 멀어진다.

***제6대 대통령선거 포스터. 1967.5.3.

한 달 정도가 지난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진행됐다. 의원 정수는 175명(지역구 131명, 전국구 44명)으로 6대 국회와 같았지만, 여당 공화당의 진출이 두드러졌다.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이 뚜렷한 7대 총선에서 공화당은 129석(73.7%)의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반면 제1야당인 신민당은 45석(25%)에 불과했다. 한달 전 대통령 선거에서도 큰 표 차로 이겼지만,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의 약진은 예상을 뛰어넘었고, 선거 부정 시비로 나라가 시끄러웠다. 이 선거는 3선개헌과 관련해 뒤에 다시 살펴본다.

당시 박정희는 ‘50세 장년’이었지만, 윤보선(1897~1990)은 ‘70 노인’이었다. 내놓고 말은 하지 않아도 윤보선의 시간은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많았다. 평균수명이 80세 중반으로 늘어난 지금도 70세가 넘으면 은근히 배척하는 세상인데, 50여 년 전에는 더했을 것이다(67년의 평균수명은 남성 59세 여성 66세였다). 여당도 ‘대통령의 연임은 1차에 한(限)한다’는 3선 금지 조항 때문에, 4년 뒤인 1971년 제7대 대선에서는 새로운 인물이 나서야 했다.

여야는 각기 다른 이유로 고민이 시작된다. 이 고민의 과정을 우리는 흔히 권력투쟁(權力鬪爭)이라고 한다. 여·야의 권력투쟁 모습은 서로 다르다. 야당은 입으로, 머리로 때로는 돈으로 권력투쟁을 벌이지만 여당은 이런 방식 말고도 권력기관, 수사기관 등이 동원돼 겁도 주고 험한 꼴을 보이기도 한다. 권력을 가진 여당 측의 투쟁이 훨씬 살벌하다.

이 무렵 미국은 한국이 정치적·경제적 혼란이나 쿠데타 후유증에서 벗어나, 안정으로, 또 민간 정부로 순항하고 있다고 여긴듯하다. NYT는 대선을 정리하는 기사의 제목으로 ‘한국 대선, 안정을 선택’(Korean Election Augurs Stability)라는 제목을 뽑았고, 이틀 뒤 사설의 제목도 ‘한국에서의 안정’(Stability in Korea)라고 붙였다. 5일 자 기사부터 살펴보자.

한국 대선, 안정을 택하다

(서울, 한국, 5.4) 군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은 어제 큰표 차이로 재선에 성공 함으로써 권력기반의 의미있는 확장을 보여줬다. 체격이 작은 편인 예비역 장성으 로만 49세인 박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이자 오랜 정치 경륜을 지닌 윤보선 후보를 백만표 이상의 차이로 이긴 것은 정세가 자주 요동치는 한국이 향후 4년 동안 정치적인 안정을 선택한 것으로 관측통들은 보고 있다.

한국의 식자층은 오랫동안 어떤 파벌이 정권을 잡던지 전통적으로 야당 쪽을 지지해 왔는데, 지금 이름있는 상당수 지식인은 잘 웃지도 않는 박 대통령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립적인 입장으로 유명한 한 작가는 오늘 “나는 지난 1963년 대선에서는 윤보선 후보를 지지했지만, 박정희 정부하에서 이룩된 경제발전을 보고 이번에는 그를 지지했습니다.”라고 밝혔다. 이런 발언은 서울에 위치한 각 신문사 벽에 게시된 대통령선거 결과 보도를 쭉 훑어본 시민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대표적인 표현의 하나다.

“나는 이번 대선에서는 박 대통령을 찍었지만, 다음 달의 총선거에서는 야당을 찍 을 겁니다”라고 제대로 교육받은 한 시민의 이런 발언은 선거에 임하는 또 다른 관점을 말해준다. 한국의 단원제 국회는 1963년 이래 박 대통령의 공화당이 다수당이다. 국회의원 선거는 오는 6월 8일로 예정돼 있다.

지식인층에서 박정희 후보를 지지한 결과는 이번 선거의 집계를 보면 나타난다. 박 후보는 지난 63년의 대선에서 서울에서 윤 후보에게 43만 표를 뒤졌으나, 이번 선거에서는 단 8만 표 정도가 뒤졌다.

5.16 쿠데타를 주도하고 전역한 뒤 출마했던 박 후보는 지난 63년의 대선에서 15 만6,000표를 앞섰으나, 이번 선거에서는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했다. 올해 69세인 윤 후보는 서울 외에 4개의 농촌 지역 도(道)에서 앞섰다. 박 대통령은 인천, 광주, 목포와 같은 주요 도시에서도 패배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제2의 도시인 부산과 다른 5개 도(道) 지역에서 우세를 기록했다. 새로운 공업단지가 조성된 지역이나 다른 경제적인 발전으로 혜택을 받은 지역은 박 후보를 지지한 것으로 분석된다. 그리고 경제적인 혜택이 덜 돌아간 지역이나 전통적으로 표가 분산되는 서울에서 박 후보는 뒤졌다…(이하 생략)

다음, 7일 자 사설이다. 방금 본 기사도 그렇고 아래의 사설도 그렇고 미국은 한국이 소란해지거나 혼란에 빠지는 것을 전혀 원하지 않고 있다. NYT는 미국 정부가 월남도 잘하면 한국처럼 안정된 가운데 경제성장을 이루는 길로 나가지는 않을까 희망하고 있지만, 두 나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는다.

한국에서의 안정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장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는 박 대통령이 지난 6 년 동안 책임감 있는 정부와 경제성장을 위해 노력했고 1961년 쿠데타로 인해 중 단됐던 민주적인 절차로의 점진적인 복귀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인정받은 셈이다.

박 대통령의 집권 이후 한국의 공업생산력이 두 배로 늘었고 식량 생산 또한 3분의 1의 증가를 기록했다. 14년 동안의 전후 재건작업과 40억 달러 이상의 미국 원조가 한국전쟁의 비참한 폐허를 쓸어버렸다. 한국은 천연자원이 빈약하고 높은 실업률에 시달리는 가난한 나라지만 국민소득은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다.

한국은 신발과 의류, 양철 그리고 월남전 수행에 필요한 몇 가지 품목의 수출 증 가에 힘입어, 1962년부터 1966년 사이 평균 8.5%, 특히 작년에는 12%의 높은 경 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러한 성장이 가능하도록 만든 다른 중요한 요인은 한일 국 교정상화 조약이다. 박정희 정부는 국민들의 오랜 정서적인 반대와 학생들의 격렬 한 반대 시위를 무릅쓰고 용기 있게 이 협정의 체결을 추진했다.

일부 미국인들은 한국에서 일어난 이런 좋은 일들이 월남에서도 장차 일어나지 않 을까 조심스레 단서를 찾을 것이다. 미국의 꾸준한 압력으로 군사정부가 문민 정부 로 바뀌고,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정치적 안정을 달성하고, 끝내는 국민적 지지를 획득하는 이런 희망의 증거를 찾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과 월남을 놓고 단순하게 비교하는 일은 곤란하다. 월남의 상황은 북베트남이 전쟁에 직접 개입하고 있는 가운데, 키(Ky) 수상은 월남 자체가 심하게 분열돼 있고 또 내전 상태에 휩쓸리고 있는 현실을 직면하고 있다. 한국의 박 대통령은 북한의 침략을 물리친 뒤 10년 동안 노력해 이런 성과를 이룩했다. 6.25 이후 한국은 공산주의자들을 척결하고 국민통합에 성공한 나라다.

집권 6년, 조심스럽지만 박정희는 나름 보람을 느끼고, 자신감이 붙어 갔다. 경제는 물론 정치, 국방 등 국정의 여러 분야에서 기반이 단단해진다는 느낌이 왔고, 이제 나라가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는 움직임을 감지했다.

무엇보다도 대선의 결과가 그랬다. 수천 년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린 국민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4년만 더 노력하면 북한과의 국력 격차도 줄어들고, 역전도 가능해 보였다. 이런 자신감,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국민 모두가 이런 자신감을 갖도록 하는 리더는 많지 않다. 그 무렵 국민과 대통령 모두, 이런 근거 있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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