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㉑] 박정희의 시간… “또 다시 부정선거”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㉑] 박정희의 시간… “또 다시 부정선거”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4.02.03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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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와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제6대 대선(67.5.3)에 이어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6.8)는 ‘3.15부정선거’처럼 ‘6.8부정선거’라는 이름을 얻는다. 7년 만에 ‘부정’(不正)이라는 호칭이 다시 돌아왔다. 언론들도 “6.8 선거, 전례 없이 혼탁”이라고 했다.

동아일보는 1967년 5월 30일 1면에서 ‘6.8 선거 전례 없이 혼탁’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여야 모두 음식물 제공 등 선심공세로 인한 금권선거, 국무위원들의 행정독찰과 하위직 공무원의 공화당 후보 측면지원 행위 등이 성행하고 있으며, 흑색선전, 인신공격, 박수부대 동원 호별방문 등이 성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경찰에 의한 관권선거는 좀 수그러진 듯하지만, 일선 행정기관의 개입은 더욱 극성이라고 보도했다.

심지어 공화당도 “타락되고 혼탁한 분위기의 선거였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부정부패 일소’를 혁명공약으로 내건 세력들이 만든 민주공화당이 왜 부정선거를 저질렀을까?

7대 총선에서 공화당은 전체 의석의 73%가 넘는 129석을 얻어, 과반인 88석은 물론 개헌 가능선(3분의 2, 117석)도 가뿐하게 넘어섰다. 신민당 유진오(兪鎭午) 총재는 선거 이틀 뒤(6.10) 기자회견을 열고 “6.8선거는 관권 개입과 대리투표, 공개투표 등으로 얼룩진 선거로, 무효”라고 주장하고 ‘재선거’를 요구했다. 이틀 뒤 6.8국회의원 선거를 결산하는 경향신문 정치부 기자들의 좌담회가 열렸다.

사회: 소위 개헌 시비는 이번 총선의 주요 쟁점이 되었고 또 공화당이 개헌선을 훨씬 돌파했다고 해서 새로이 거론되는 것 같은데 여야가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기자(F): 선거운동 기간에도 야당은 공화당이 안정세력을 구실로 개헌선 확보를 획책하고 있다고 비난해 왔는데 막상 총선 결과가 밝혀지자 그것 보라는 듯이 “영구 집권을 위해 개헌을 획책하고 있다”고 비난했지요.

기자(C): 여당의 과잉비대로 안정보다는 오히려 여러 가지 불안의 요소들을 내포하게 됐다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박 대통령이나 김종필 당의장이 누차 강력히 부인한 것처럼 개헌 가능성은 실제로 거의 희박한 것으로 봅니다.

기자(B): 김 당의장은 “5.16혁명을 무엇 때문에 했느냐? 만약 개헌을 주장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그런 사람하고는 당을 함께 할 수 없다”고 강력히 부인했는데 사실 4.19의 역사적 교훈으로서도 개헌은 어렵다는 것이 중론인 듯합니다.

(‘7대 국회를 전망한다. 과부족과 균형 잃은 양당, 본사 정치부 기자들이 내다본 기상도’ 경향신문, 1967.6.12.)

경향신문 정치부 기자들이 짜고 헛소리를 한 것이 아니라면, 이 좌담회에 참석한 기자들은 당시의 일반적인 분위기를 전달했다고 볼 수 있다. ‘3선 개헌이 가능은 하겠지만, 온 국민이 4.19의 교훈을 잊지 않고 있고 또 김종필이 당의장을 맡고 있는 공화당이 설마 개헌을 하겠느냐’는 분위기였다. 개헌에 대한 반신반의(半信半疑)였다.

신민당은 부정선거에 항의하면서 국회 등원을 거부하고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투쟁을 계속하다가, 여섯 달 가까이 지난 11월 29일 등원해 의원선서를 한다. 대선과 총선을 치른다고 치열하게 겨루고 또 ‘부정선거’ 여부로 다투다가 67년 1년이 그냥 지나갔다. 68년 새해가 밝았다.

그런 가운데 1968년 안보위기 국면이 벌어졌다. 박정희 집권 8년째인 1968년은 우리 한반도에서는 6.25 남침 이후 남북한이 전쟁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시점이면서, 바깥 세계에서는 혁명과 변화의 큰 물결이 몰려와, 2차 대전 이래 ‘가장 시끄럽고 사건이 많았던 1년’으로 기록된다.

1967년 ‘선거의 1년’이 끝나고 68년 새해가 시작되자 놀라운 사건이 터진다. 1월 21일 밤 10시, 박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북한 정찰국 산하 124군 소속 무장특공대 31명이 청와대 코앞까지 쳐들어왔다. 이들은 대통령 관저에서 불과 500m 떨어진 청운동 입구에서 비상경계 중이던 경찰의 검문에 걸렸다. 청와대로 가는 마지막 단계에서 걸렸으니 망정이지, 아찔한 일이었다. 북한의 무모한 적대행위와 도발에 온 국민이 놀랐다. 그 가운데서도 당사자인 박정희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박정희는 그때 51살로 한창의 나이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틀 뒤인 1월 23일 낮 1시 45분, 북한 원산(元山) 앞바다에서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Pueblo)호가 북한 초계함 4척과 미그(MIG) 전투기 2대의 위협을 받고 승조원 83명(나포 과정에서 1명 사망)을 태운 채 원산(元山)항으로 끌려갔다.

푸에블로(Pueblo)호는 미 해군의 정보수집함으로 1968년 1월 23일 북한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군에 의해 나포됐다. 북한은 푸에블로호를 동해 원산(元山) 앞바다에 전시했다가, 1998년 평양의 보통강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푸에블로호는 83명의 승조원과 함께 나포됐으나, 그해 연말 승조원 82명(1명은 나포 과정에서 사망)은 미국으로 송환됐다. 푸에블로호는 1944년 건조돼 10년 동안 미 육군의 보급선으로 사용된 뒤 1954년 퇴역했다. 그 후 1988년 정보수집함으로 개조돼 미 해군이 사용했다. 54m 길이에 폭 9.8m로, 만재 시 895톤의 선박이었다.

이틀 사이로 발생한 두 개의 사건에 대한 미국의 반응이 너무 대조적이어서 박정희 대통령은 격하게 반발한다. 미국은 북한 무장공비가 ‘박정희의 목을 따기 위해’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한 비상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보복공격은 꿈도 꾸지 말라’면서 발목을 잡다가, 승조원 83명이 탄 푸에블로호가 납치되자 전쟁 직전 단계인 ‘데프콘(DEFCON: Defence Readiness Condition, 전투준비 태세) 2’를 발령하면서까지 난리를 쳤다.

***군경에 생포된 무장공비 김신조.1968.1 북한에 나포된 푸에블로호. 1968.1
군경에 생포된 무장공비 김신조.1968.1 북한에 나포된 푸에블로호. 1968.1

미국은 원자력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93,970톤)와 구축함, 잠수함 등을 동해로 출동시키고, 오키나와에 주둔 중이던 미 공군 전투기들을 군산과 오산의 미 공군기지로 이동 배치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2월 2일부터 판문점에서 북한과 푸에블로호 승무원 조기 송환을 위한 비밀회담까지 가진 것으로 드러나자, 한국 측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은 물론 심한 배신감까지 느낀다.

박 대통령은 “북한에 보복해야 한다”고 미국 측에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런 대통령을 달래기 위해 미국 존슨 대통령은 한국군 군비 증강을 위해 1억 달러의 추가 군사원조를 의회에 요청하고, 이어 사이러스 밴스(Cyrus R. Vance) 특사를 한국에 파견한다(2.10).

사이러스 밴스(1917~2002) 특사는 예일대 법대를 졸업한 변호사로, 1961년 케네디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 고문, 육군장관, 국방부 차관 등을 지냈다. 1967년 미국 디트로이트 인종폭동과 그리스와 튀르키예 사이의 키프로스 분쟁 때 탁월한 조정 능력을 보여준 분쟁 조정가로 존슨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인사였다. 밴스는 그 뒤 1976년 지미 카터 정부에서 키신저의 후임으로 국무부 장관에 오른다. 케네디, 존슨, 카터 등 3명의 민주당 출신 대통령과 일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미국은 한국의 보복공격이 남북 간 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었다. 미국은 베트남전에서도 국내외의 반대 여론과 전황의 악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한반도에서 사태가 악화될 경우,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북베트남은 베트남 전역에서 구정 대공세(1968. 1. 30~9. 23)를 펴면서, 사이공에 있는 미국 대사관까지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이를 계기로 미국 내에서는 철군 여론이 높아진다. 베트남전에 대한 여론도 점점 나빠졌다. 이런 판국에 두 개의 전쟁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11월에는 대통령선거까지 있다.

밴스 특사의 제1의 임무는 박정희의 ‘대북 무력보복’을 막는 것이었다. 그가 한국 에 오기 10여일 전인 2월 2일 이후락 대통령 비서실장은 포터(William J. Porter) 주한 미국대사에게 “한국 정부는 실질적으로 여러 가지 군사적 계획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 존슨 대통령은 ‘박정희가 원하는 대북 군사 보복은 북한에 말려들어 가는 꼴’이라고 봤다. 세계적 차원에서 볼 때 북한의 잇따른 공격은 베트남전 지원 차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에 이어 벌어진 북베트남과 베트콩들의 ‘구정대공세’(1.31)는 그 심증을 굳히게 했다. 미국 본토는 베트남전 반대시위와 흑인 민권운동 등으로 시끄러웠다. 베트남전과 긴밀하게 연결된 북한이라는 폭탄을 살살 다뤄야 했다.(고경태, <고경태의 1968년 그날, 쏘지 마, 피곤해> 한겨레21, 2013. 12. 13.)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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