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㉔] 북한, 남침 혹은 베트남전 지원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㉔] 북한, 남침 혹은 베트남전 지원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4.02.24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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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와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1.21사태 발생 몇 해 전부터 도발의 빈도와 강도를 높여왔다. 북한은 우선 가까이 있는 우방 중국을 노크한다.

북한 김일성은 1965년 평양주재 중국대사(郝德靑, 하오더청)에게 “북한은 조만간 남침 전쟁을 일으킬 것이며, 전쟁을 하게 되면 중국에서 군대를 파병해 주길 바란다”고 속을 떠본다.

또 해체된 동독(東獨)의 외교문서를 보면 1975년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은 그때에도 남한에 대한 무력침략을 거론하면서 중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국력의 격차를 고려해 볼 때, 그 무렵이 남침의 마지막 기회로 생각하고 초조했을 것이다.

참고로 청샤오허(成曉河) 중국 인민대 교수는 지난 2013년 10월 한국 평화문제연구소 창립 30주년 국제학술회의에서 “김일성 주석이 1965년 평양주재 중국대사에게 북한이 조만간 전쟁을 일으킬 것이며, 전쟁을 하게 되면 중국에서 군대를 파병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청 교수는 기밀이 해제된 중국 외교문서 ‘북한주재 조선인민공화국 대사 하오더칭의 김일성 주석 담화 현장’을 근거로 이와 같은 주장을 내놨다.

이 담화에서 김일성은 “전쟁을 하지 않고서는 분단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남조선 인민들도 계급투쟁이 고조되고 갈등이 증대돼 전쟁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청 교수는 1960년대가 사실상 북한이 최후의 수단으로 다시 무장통일을 내세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였지만 김일성이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 내 북한 전문가(신종대 북한대학원대학 교수)는 이러한 김일성의 발언은 실제로 남한을 침략하려고 하기보다는 중국에 대한 일종의 협상 전략이고 중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려는 제스쳐로 봐야 한다는 견해를 보였다. 그 이유로 비슷한 시기인 1965년 3월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이 게릴라 조직을 만들어 한국에 침투하라고 북한에 권유했을 때 김일성이 이 제안에 대해 반대의견을 내세운 사실을 들었다. 김일성은 한국은 해안선이 너무 길고 산이 헐벗어 은닉할 곳이 마땅치 않은 데다 교통이 발달해 고립되기 쉽다는 점 그리고 미군이 주둔해 있는 상황에서 한국 내 게릴라 활동은 자살행위가 될 수 있다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김일성은 그 뒤 1975년 중국을 방문해서도 남조선해방을 위해 군사적 행동을 역설하며 중국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긍정적인 반응을 얻지 못한 사실이 옛 동독 외교문서에서 확인되기도 했다.

한편 청 교수는 한국이 독일식 흡수통일에 나선다면 중국이 이를 지지할 수도 있다는 전망도 제시했다. 청 교수는 중국이 신속, 자주, 자체흡수로 요약되는 독일식 흡수통일이 나쁜 방법이 아니라는 입장이라며, 통일 한국이 미국과 동맹을 맺는 불편한 상황이 오더라도 이 같은 입장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한상미 기자, “북한 김일성, 1965년 제2의 남침준비...중국에 파병요청”, 2013.10.24, VOA Korea)

그 무렵 북한은 ‘4대 군사노선’을 마무리 짓고, ‘도발의 극대화’라는 제5의 군사노선을 따르는 듯했다. 그 뒤에 밝혀지지만, 다 이유가 있었다.

북한이 남침 준비를 완료했다는 사실은, 1996년 5월 22일 발레리 데니스포 러시아 외무부 아주국 제1 부국장의 증언으로 확인됐다. 그는 “김일성이 75년 4월 중국을 방문해 ‘남한과 전쟁할 준비가 다 됐다’고 지원을 요청했다”며 “김일성은 ‘(남조선과의) 전쟁에서 잃을 것은 군사경계선이며 얻을 것은 조국의 통일’이라며 당장 적화통일하려는 야심을 보였다”고 말했다.(송의달, “박정희의 ‘10월 유신’은 어떻게 한국의 ‘위대한 성공’이 됐나?” 조선일보, 2023.3.7.)

***북한은 열악한 경제 사정이나 노후한 무기 등을 감추려고 열병식 등에 과다한 투자를 한다는 말을 듣는다. 당 창건기념일(10.10), 해방기념일(8.15), 김일성 생일(4.15), 인민군 창건기념일(4.25), 전승기념일(7.27), 인민정권 창건일(9.9) 등을 기념해 5년 주기로 행사를 연다.
북한은 열악한 경제 사정이나 노후한 무기 등을 감추려고 열병식 등에 과다한 투자를 한다는 말을 듣는다. 당 창건기념일(10.10), 해방기념일(8.15), 김일성 생일(4.15), 인민군 창건기념일(4.25), 전승기념일(7.27), 인민정권 창건일(9.9) 등을 기념해 5년 주기로 행사를 연다.

한국이 미군과 유엔군의 도움으로 북한을 물리치고 휴전협정(1953.7)을 맺은 이후 70년 동안 북한은 실로 다양한 형태의 도발을 시도했다. 북한은 1980년대까지는 주로 고정간첩이나 무장공비 침투, 어선이나 항공기 납치, 간첩(선) 침투 등 방식으로 도발하다가 1990년대 이후는 미사일 발사나 핵 실험, 방사포 발사 등으로, 2020년 이후에는 핵무기 사용 운운하며 도발과 공갈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특히 북한은 한국에서 좌파 정권의 집권이 현실이 되자, 좌파 정권에 대해서는 위협의 강도를 약하게 하고, 우파 정권에 대해서는 ‘핵무기’ 사용 운운하면서 더욱 험악한 국면을 연출하는 등 대응을 달리하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한국 내에서 빚어지고 있는 이념(理念) 갈등도 이러한 북한을 어떻게 인식하고 이들과 어떤 단계의 관계를 맺을 것인가의 차이에서 주로 비롯된다. 우파진영에서는 북한은 출범 이후 지금까지 남한에 대한 적화(赤化)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지금은 핵무기를 앞세우고 중국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여러 차원에서 한국의 적화를 추구하고 있다고 믿는다. 반면 좌파 진영에서는 같은 민족으로서 북한은 한국을 남침할 의사나 능력이 없으며, 국가로서의 생존을 위해 굶으면서도 핵무기를 개발해 자신을 지키면서, 미국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1.21사태가 발생하기 몇 해 전부터 북한의 대남 도발 건수는 급격하게 증가한다. 1965년 42건, 66년 37건, 67년 423건으로 급증하고 68년 들어서는 1.21 청와대 습격, 1.23 푸에블로호 나포, 10~11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등이 이어졌다. 이어 69년에도 주문진 무장간첩 침투, 미군 EC-121기 격추, 흑산도 간첩선 침투, 대한항공 YS-11기 납북 등이 발생했다.

북한은 휴전협정 이후 70년 동안 수 없는 도발을 감행했다. 이 가운데 1968년의 1.21사태나, 1983년의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1987년의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사건 그리고 2010년 천안함 피격사건 등은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주요한 도발로 기록된다. 북한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민간인 납치), 미얀마(아웅산묘소 폭탄테러), 말레이시아(김정남 피살) 등을 대상으로도 도발을 저질렀다.

특히 북한은 한국이 월남전에 참전한 기간(1964~1973)에 한국에 대한 군사도발을 강화해, 한국을 불안하게 만들어, 추가 파병을 막는 방법으로 월맹을 돕는 역할을 했다는 분석도 있다. “자유 월남을 지켜서, 우리의 안보를 굳건하게 한다”는 한국 정부의 구호를 무력화하는 수법이었다. 그래서 1968년 여름으로 예정됐던 제5차 파병은 무산되기도 했다(장슬기 기자, “헐값의 총알받이 용병, JP가 말하지 않은 베트남전”, 2016.2.1., 미디어오늘)

1.21사태가 발생했을 당시 미국의 시각도 그렇고, 이 무렵 북한의 잦은 무력 도발은 한반도에 안보 위기를 조성함으로써, 한국군의 월남 증파를 막는 ‘북한 나름의 북베트남(월맹) 지원’ 전술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이런 분석은 주로 미국 쪽에서 나오는데, 미국은 1.21사태 때도 이런 분석틀로 사태를 파악하고, 박 대통령의 단호한 대북 보복이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며 밴스(C. Vance) 특사를 보내서 보복공격을 막았고, 북한의 남침 가능성에 대해서도 현실성이 희박한 것으로 파악했다.

미국 정부는 1960년대 후반 이래 한반도에서 한국의 행동에 따른 자신의 군사 연루 가능성에 대하여 우려했다. 1968년 5월 CIA 보고서는 북한이 최소 향후 수년 동안에는 새로운 한국전쟁을 일으킬 의도는 없는 것으로 결론짓고, 중요한 가능성은 북한의 소규모 도발이 남한의 보복으로 이어져 대규모 갈등으로 확산될 수 있는 위험성이라고 분석했다.(신욱희, ‘데땅트와 박정희의 전략적 대응, 박정희는 공격적 현실주의자인가?’ 세계정치 14호, 2010.3)

그래서 미국은 북한의 호전적인 도발과 마찬가지로 한국군의 북한에 대한 적극 대응도 위험 요인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런 미국의 속셈을 박 대통령이 모를 리가 있겠는가? 아무리 동맹이라고 해도 의견의 차이는 있게 마련이다.

1969년 7월 닉슨 대통령은, 미국이 비록 조약을 존중하고 군수물자 형태로 원조 를 제공하겠지만, 장차 분쟁 발생시에 자신의 힘으로 군사적 공격에 대처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을 아시아 동맹국들에 통지하는 괌 독트린(Guam Doctrine)을 발표했다. 그는 미국 국민들의 요구에 대해 ‘더 이상의’ 베트남은 없을 것이라고 대응한 것이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한·미 간의 특수관계로 볼 때, 한국은 신 정책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실상 닉슨은 한국을 괌 독트린 수행의 중요한 본보기로 생각하고 있었다.(한·미관계연구회, ‘프레이저 보고서’, 실천문학사, 1986)

이런 안보 위기를 겪으면서 특히 닉슨행정부의 서운한 행태를 겪은 박정희는 국내외 환경 변화에 대해 깊은 생각과 함께 중대한 결심을 하고, 하나씩 실천에 옮긴다. 박 대통령의 이러한 결심은 군사 안보, 경제 또 국내정치 등 여러 부문에서 드러난다.

달라진 안보환경에 대한 대통령의 대응은 국제적으로 고립을 불러오고 국내적으로는 독재자라는 비난을 불러오게 된다. 독재(獨裁)적인 통치라고 비판받는 박정희의 1970년 국가비상사태선언 이후의 국내 정치는 미국의 이러한 뒷걸음과 배신에 대한 반격이고 대응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미국으로서는 취할 수 있는 대외정책이었지만, 대통령 박정희나 한국으로서는 정권이나 국가 생존의 위기로 해석됐다. 달라지는 환경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정권이나 국가는 모두 사라진다. 과잉 대응도 문제겠지만, 엉뚱하게 해석해 속으면, 정권은 물론 나라가 망하거나 골병이 심하게 든다. 박정희로서는 후반 집권 10년 가까이 이 틀 속에 갇혀서 많은 비난과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이 거북한 사실도 우리의 역사로, 당시 외부 환경에 대한 나름의 반응일 것이다.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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