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㉖] 대통령의 하루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㉖] 대통령의 하루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4.03.09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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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와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휴전협정이 맺어지던 1953년 우리나라의 1인당 소득은 67달러였고, 5.16이 일어난 1961년은 82달러였다. 해방 이후 이승만, 장면 정부에서도 노력했지만, 쉽게 형편이 좋아지지 않았다. 8년 동안 늘어난 액수가 겨우 15달러였다. 우리의 소득이 아프리카 가나(Ghana, $179, 1961)의 절반이었다.

우리나라는 1940년대에 해방과 정부 수립, 남북 분단을 겪고, 50년대에는 전쟁과 복구, 부흥의 시간을 보내고 60년대를 맞았지만, 아직 이륙(離陸, Take-off)을 하지 못하는 비행기 신세였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1966)이 시작된 이듬해(1963) 우리의 국민소득은 겨우 104달러를 기록한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우리나라의 피폐함과 1인 소득 증가세는 정말 경이롭다. 해방되고 5년 뒤 발발한 6.25 전쟁까지 우리나라는 세계의 가난한 나라의 대표 격이었다. 그런 나라에서 전쟁이 발생했으니 그 참상은 표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세계은행(WB) 통계에 따르면, 1962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110달러로, 아프리카의 가나(190달러)나 가봉(350달러)보다도 뒤졌고, 아시아의 필리핀의 반 수준이었다. 1966년 필리핀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에게 “한국도 필리핀만큼 잘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4년 뒤 1970년 필리핀을 앞질렀다. 또 말레이시아는 60년대 초 국민소득이 한국의 3배나 됐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다음 2위의 국가였지만, 1970년대 말, 말레이시아가 한국을 배우겠다며 ‘동방정책’을 추진했다.(1962년 가봉보다 못살던 한국 1970년 필리핀, 2005년 대만 앞질러, 2012.9.19, 동아일보)

해방 당시 경제적 여건에서는 북한이 우리보다 훨씬 유리했다. 1인당 국민소득도 해방 이후 30년 가까이 앞서다가, 1974년이 되어서야 ‘한국 535달러, 북한 461달러’로 역전된다. 남북한의 소득격차가 1974년에 역전했다고 하지만, 북한이나 공산권 국가의 통계 조작 가능성 등을 감안하면, 사실은 그 몇 해 전(1970년 무렵)에 역전이 이뤄졌을 수도 있다.

한국과 북한의 격차를 잘 정리한 외국 지도자는 많이 있었지만, 최근의 경우로는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들 수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3년 7월 한국전 정전 60주년을 맞아 발표한 담화에서 “한국전쟁은 남한의 승리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한국인은 자유와 번영 속에서 살고 있고 북한은 억압과 빈곤에 빠져있다”고 정리했다. 해방 이후 70년대 중반까지 30년 가까이 한국을 앞섰던 북한은 낡은 이념이 된 사회주의와 독재정권 치하의 폐쇄성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가난으로 다가섰고, 시장주의와 개방정책을 추구한 한국은 군사독재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도 고도화하면서 경제성장에 성공했다.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은 대륙침략을 뒷받침하기 위해 북한 지역에 군수공장, 발전소 등을 집중적으로 건설한 것과 반대로, 남한에는 경공업과 농업 위주로 산업을 배치했다. 북한은 일제가 남긴 중공업 인프라와 풍부한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50년대와 60년대, 70년대 중반까지 경제력에서 한국을 앞섰다. 1960년 북한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137달러로 남한(94달러)의 1.5배에 달했다. 전력 사정도 1965년에는 북한이 남한의 4배였다. 북한은 한국의 전쟁고아와 실업자들을 위해 지원금을 보내겠다고 제의할 정도였다.

일반적으로 1974년부터 한국이 북한을 앞질렀다고 하나, 일부에서는 사회주의 통계의 과장 등을 감안하면, 1968년경부터 남한의 소득이 북한을 앞질렀다고 한다(한국이 북한을 앞섰던 이유, 2017.3.23. 중앙일보, 김병연 교수)

북한의 무력도발, 위협 등을 극복하면서 ‘경제 제일주의’와 ‘조국 근대화’를 구호로 내걸고 전력 질주한 제3공화국 정부는 한 해 한 해, 해가 가면서 여유를 되찾고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은 세계적으로 아주 드문 경우에 속한다. 지난 50여 년간(1953~2008) 세계 각국의 1인당 GDP 증가율을 비교해 보면, 상위 10개국 가운데 한국은 3위를 차지하고 있다. 1위는 적도기니, 2위는 타이완, 3위가 한국이다.

또 경제학자 쿠즈네츠(S. Kuznets)는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1인당 소득이 적어도 30~40년 이상 지속적으로 증가할 때 ‘근대적 경제성장’(Modern economic growth)이 존재한다고 했는데, 우리나라는 1918~1960년경까지는 추세적으로 상승했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1960년대 이후에는 ‘근대적 경제성장’이 나타났다. 또 경제발전 이론 가운데 하나로서 한 국가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구조적으로 변화(Structural change)를 보이는 시점을 루이스 전환점(Lewisian Turning Point)이라고 해서, 농업부문의 과잉노동이 사라지고 도시부문의 실질임금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시점을 구조적 전환점으로 보는데, 한국 경제에서는 1960년대 중엽 무렵 실질임금의 변화가 뚜렷해, 루이스 전환점이 1960년대 중엽에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1945년의 해방과 대한민국의 경제발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3집, 허수열)

고조되던 안보위기도 한풀 꺾이고, 희망의 70년대를 눈앞에 둔 그 무렵(1969.6) 국내신문에 박 대통령의 하루 일과가 실렸다. 사람들은 보통 대통령, 재벌 회장, 인기 연예인 등의 일상생활, 사생활 등에 대해서 궁금해한다. 나이 든 사람들은 “사람 사는 일이 다 같지, 지지고 볶고, 뭐 다른 게 있겠어”라고 시큰둥해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무척 궁금해한다. 우리 보통 사람의 일상과는 뭐가 다른지, 어떻게 하루의 시간을 보내는지, 식사 때는 뭘 먹는지, 국민들은 이런 내용에 대해 궁금해하지만, 언론사 처지에서는 이런 기사를 싣기 쉽지 않다. 1.21 사태 등 안보위기 속에서 대통령은 어떻게 일과를 보냈을까?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 집무실(1층)과 가족의 거주 공간(2층)으로 사용된 구 청와대 본관. 증축이 이어져 그 당시는 525평 규모였지만, 1993년 철거됐다.

박 대통령의 24시는 아침 6시 청와대 본관 2층 침실에서 기상과 함께 시작된다. … 9시 정각 본관 아래층에 자리잡은 집무실에 들어선다. 의전비서실에서 미리 짜 놓은 스케줄을 책상 위에 꽂아 놓고 그날 하루의 일을 정리해 본다. 기억력이 남다른 대통령은 그날 누구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하겠다는 생각을 미리 메모해 두는 것이 습관처럼 돼 있다는 것. 박 대통령은 제일 먼저 이후락 비서실장을 만난다. 이 실장을 만난 자리에서 밤새 일어났던 일과 그날 스케줄이 다시 한번 검토된다.

이 실장과의 상의가 끝나 면 결제 서류가 밀려 닥친다. 제1, 제2 경제, 정무, 민정, 공보, 총무비서관 등이 차례로 한 사람씩 거쳐 간다. 일단 제출된 결제서류는 모두 읽어본 뒤 사인하고 처리 방향까지 제시해서 내려보낸다. 외래인의 접견은 보통 10시부터 시작된다. 정일권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 부 장관의 보고사항, 고위급 인사들의 출입국 신고, 외무사절의 이·취임 예방 등이 거의 매일 같이 계속된다. 12시 30분쯤 회의에 참석했던 국회의원 및 장관들과 식당에서 짜장면이나 냉면, 국수 등으로 간단히 점심을 때운다. 비서관들은 외식하는 경우가 있어도 박 대통령 자신이 외식하거나 성찬을 드는 경우는 없다.

회의는 주로 하오에 열린다. 박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는 브리핑 차트에 의한 보고사항으로부터 시작된다. 브리핑이 진행되는 동안 모호한 점이 있으면 해명될 때까지 질문이 계속된다. 막료들의 실력을 평가하는데 좋은 찬스이기도 하다… 5시 30분 일과가 일단 끝나면 웬만한 일 없이는 비서관들을 찾지 않는다. 6시까지 잔무를 처리하고 그날 들어온 석간신문을 빠짐없이 읽는다. 7시쯤 가족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TV뉴스를 잠시 시청한 다음 곧 2층 서재로 들어간다.(전진하는 집념, 경향신문 1969.6.30.)

이 기사가 보도될 당시 청와대(靑瓦臺)는 1993년 11월 철거된 옛 청와대 본관을 사용할 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청와대 구 본관’은 1939년부터 일본 총독관저로, 해방 후에는 미군정장관 관저로 사용됐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된 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입주해 관저 겸 집무실로 사용하면서 경무대(景武臺)로 불리다가, 제4대 윤보선 대통령(재임: 1960.8~1962.3) 때 청와대(靑瓦臺)로 명칭이 변경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3년 12월 제 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구 청와대 본관’으로 가족과 함께 이사 왔다. 구 청와대 본관은 1층은 집무실, 2층은 대통령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사용되면서, 증축되기도 했다. 이 기사는 1차 증축이 끝난 1969년의 대통령의 하루 일과를 그린 기사였다.

이 기사에는 ‘일에 파묻혀 사는 대통령’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아주 재미없고 무미건조한 일과엿다. “사람 사는 일이 다 같지 뭐” 하겠지만, 대통령은 권력의 최정점이다. 권력이 뭔가? 쉽게 말해 권력은 ‘자리나 돈을 나눠주는 힘’이다. 위의 신문 기사에서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아마 대통령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서재에서 ‘이번에는 어느 장관을 바꾸고, 누구를 보안사령관을 시키지?’ ‘이 공사는 어느 재벌에게 맡길까?’ 이런 일을 궁리했다면, “사람 사는 일이 다 같지 뭐” 이렇게 말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도 사람이긴 하지만, 큰 권력을 가진 아주 특이한 신분의 사람이다.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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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웅정 2024-03-09 18:22:31
정치인, 기업인 사이에 왜 하찮은 딴따라 연예인 따위를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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