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㉘] 한국 공화당, 박대통령 3번째 임기 요청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㉘] 한국 공화당, 박대통령 3번째 임기 요청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4.03.23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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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와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한국 정치권의 개헌 소용돌이는 미국 신문에도 실린다. 1969년 2월 1일, NYT는 ‘공화당, 박 대통령에게 3번째 임기 요청’(Seoul Party Asks 3rd Term For Park)이라는 기사에서 상황을 이렇게 정리한다.

한국 공화당, 박 대통령 3번째 임기 요청

(한국 서울, 2.1) 오는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3번째로 4년 임기 선거에 출마할 수 있게 하는 헌법 개정 움직임을 둘러싸고 한국에서 정치적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군사정부가 1962년에 통과시킨 현행 헌법은 대통령의 3연임을 금지하고 있다.

예비역 대장으로 올해 51세인 박 대통령의 3연임을 위한 개헌 움직임은 여당인 공화당 내의 지지자들에 의해 상당 시간 조용하게 추진돼 왔다. 공화당의 개헌 움직임은 지난달 초 당 지도부가 ‘국가의 강력한 지도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헌법개정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기자회견에서 여러 차례 밝히면서 공론화됐다. 공화당 지도부는 현재 진행 중인 조국 중흥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하며, 이렇게 해야 경제성장률이 높아지고 북한의 점증하는 군사적 위협에서 한국의 방위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지난 1967년 대통령에 재선된 이후 박 대통령이 1971년 임기가 끝나고 물러갈 것인가 여부는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이슈가 돼 왔다. 3선개헌 문제는 지난 1967년 국회의원 선거 이후 발생했던 부정선거 시위가 수습된 뒤 유지돼온 정치적 평온을 깨트리고 예민한 국민의 반응을 불러올 수 있다.

야당 신민당은 여당의 3선개헌 시도를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막겠다”고 다짐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박 대통령에 반대하는 모든 사회 세력들을 결집해 5인특별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신민당 유진오 총재는 “당의 운명을 3선 개헌 저지에 걸겠다”고 최근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또 최악의 경우 신민당은 국회의원직 총사퇴도 불사하겠다고 유 박사는 말했다. 현 한국 헌법은 ‘국회는 2개 이상의 정당이 참여해 운영’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신민당 의원 전원이 사퇴한다면, 국회 운영이 마비될 수 있다.

오랫동안 기획되고 조용하게 추진되던 박정희를 위한 3선 개헌안은 이렇게 공식화됐다. 그러나 공화당 내부에서는 ‘장기 집권에 항거한 4.19의 교훈과 자유민주주의 국가 재건을 위해 궐기한 5.16혁명의 순수성을 지키고 박정희 대통령을 구국 혁명의 지도자로 영원히 존경받을 수 있도록 하려면 3선 개헌을 해서는 안 된다’(김종필)고 생각을 하는 국회의원들이 적지 않았다.

개헌안 통과는 최소한 117명 이상의 찬성이 필요했으나, 공화당 내 지지 의원은 90명에 불과했다. 그 무렵 박정희는 이후락 비서실장을 보내, 당직에서 물러나 집에서 쉬고 있는 김종필을 불러서 청와대에서 만났다. 두 사람의 대화가 좀 길지만 인용할만하다. 간단한 인사말과 정가 이야기가 오간 끝에 박 대통령이 본론을 끄집어낸다.

박 대통령은 “임자밖에 없어. 임자가 날 도와야지 누가 날 도울 거야. 날 도와주고 조금 남은 일 더 하게 해줘. 이번 한기(期)만 더 하겠다는 건데, 그것도 안 되겠어?”라고 했다. 그는 가까이 다가와서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이봐 같이 죽자고 혁명해 놓고 혼자 살려고 그래? 60년대엔 빈곤을 겨우 퇴치했는데, 70년대엔 중화학공업을 일으켜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야 할 것 아니야. 이 길을 같이 가자”는 대통령의 눈에는 눈물까지 글썽글썽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며칠 뒤 박 대통령이 다시 나를 불렀다. 뉴코리아컨트리클럽으로 골프를 치러 가자면서 시커먼 지프차를 갖고 나오셨다.

나는 박 대통령과 함께 지프차 뒷자리에 탔다. 앞자리 조수석엔 신동관 경호실 차장이 타고, 경호원 몇 사람은 다른 차로 뒤따라 왔다. 박 대통령은 내게 “그래, 생각을 좀 해봤어?”라고 물었다. 나는 “생각을 해봤는데, 명분이 서지 않습니다. 그래서 냉큼 찬성이 안 됩니다”고 답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명분이 뭐 있어. 하는 것이 명분이지”라고 했다. 이어서 대통령은 이런 말로 나를 설득했다. “우린 혁명을 하지 않았나. 그 이전에 있던 모든 질서와 체제 일체를 부정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혁명을 했어. 그 정신에서 볼 때 3선 개헌 아니라 4선 개헌이라도 필요하면 할 수 있는 것 아니야?” 나도 내 의견을 이야기했다.

“맞습니다. 이 나라를 근대화하기 위해서라면 나아가는 과정에 이것저것 기복이 있다고 해도 이를 타고 넘어가야 한다는 데는 동감입니다. 제가 지금 생각하기에도 각하 이외엔 이 나라를 이끌어갈 분이 없습니다. 그런 점은 있습니다. 하지만 개헌을 하는 것은 상당히 힘이 들 겁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힘이 드니까 임자가 좀 선두에 서서 해달라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며칠 뒤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호출이 왔다. 박 대통령은 나를 보더니 “자네가 찬성해 주지 않으면 이건 안 되는 일이야! 그동안 생각해 봤어?”라고 했다.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린 마지막 답을 내놨다. “정 그러시다면… 하시지요.” 대통령과 나는 혈맹(血盟)이었다. 박 대통령은 내 아내 박영옥의 삼촌이기도 했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그런 관계였다. 결국 청와대에 세 번 불려가 내 주장을 꺾었다. 박 대통령 얼굴에 안도감이 번졌다. 대통령은 “임자가 이제 좀 돌아다니면서 설득해 줬으면 해. 임자가 설득하면 많이들 귀를 기울일 거야. 해 줘”라고 당부했다.(김종필, 『김종필 증언록』, (주)미래엔, 2016)

우리 헌정사상 6번째의 개헌인 ‘3선 개헌안’은 그해(1969) 국회에서 공화당 단독으로 본회의장이 아닌 제3 별관에서 통과되고(9.14), 국민투표에서 확정된다(10.17). 개헌 국민투표는 투표율 77.1%에 찬성률 65.1%의 상당히 저조한 기록을 냈다. 박 대통령이 경제 개발에서는 성과를 내고 있었지만, 장기 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두려움 또한 여전했다. 이제 박 대통령은 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있게 됐다.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7월 17일 제정됐다. 그 이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임시헌장을 제정했고 이어 9월 11일 임시헌법을 제정했다. 임시헌장과 임시헌법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고, 영토는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정치체제는 민주공화국과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1948년 5.10 총선거를 통해 정부가 수립되자, 대통령제와 국회 단원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이 제정된다.

그동안 있었던 9차례의 개헌을 정치체제 중심으로 살펴보면, 1차 개헌은 1952년(발췌 개헌), ‘대통령 4년 중임제와 국회에서의 간선투표, 단원제 국회(260석)’였던 것을 ‘대통령 5년 단임제, 직선투표제, 국회 양원제’로 바꿨다.

2차 개헌은 1954년(사사오입 개헌)은 대통령 5년 단임제 조항에 ‘단, 초대 대통령은 제외’라는 문구를 추가하는 개헌이었다. 그래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56년과 1960년 대선에서도 당선된다.

3차 개헌은 4.19혁명 이후 1960년에 이뤄졌다. 의원내각제 실시, 국회 양원제, 대통령 5년 중임제, 지방자치제 실시, 헌법재판소 설치, 대법원장과 대법관 선거제 실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화, 국민기본권 강화 등 4.19혁명의 열기가 담긴 개헌안이었다.

4차 개헌은 같은 1960년에 이뤄졌는데, 3.15부정선거 관련자와 이승만정권 당시의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는 내용이 헌법에 담긴다. 그러나 이 개헌은 포퓰리즘 개헌이라는 비난을 듣는다.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한 뒤 실시된 5차 개헌은 1962년에 실시돼 제3공화국의 헌법이 된다. 의원내각제와 국회 양원제인 정치체제를 대통령 4년 중임제와 직선제, 국회 단원제로 되돌렸다. 이 개헌안은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만들었지만, 처음으로 국민투표로 확정되는 절차를 거쳤다.

1969년의 6차 개헌은 대통령의 3선을 허용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후 7차 개헌은 1972년 유신헌법 제정을 위한 개헌, 8차 개헌은 1980년에 출범한 제5공화국의 헌법으로 대통령의 7년 단임제와 간접선거를 통한 선출이 주 내용이었다.

마지막으로 1987년에 이뤄진 9차 개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주 내용으로 임기는 5년으로 되돌아왔다. 1987년의 개헌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개헌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공화당의 3선 개헌안이 국회에서 변칙으로 통과됐다. 1969.9.14.

정부와 여당 공화당이 이런 상황을 진행하는 동안 야당인 신민당도 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박정희에게 연패한 ‘70 노인’인 윤보선(尹潽善, 1897~1990)은 한계가 뚜렷했고, 학계에서 영입한 유진오(兪鎭午, 1906~1987) 박사는 정계 투신 이후 끝없는 스트레스의 파도에 지쳐 쓰러졌다. 당 총재인 유진산(柳珍山, 1905~1974)은 여당인 공화당에서는 ‘최상의 파트너’(이희호, 『동행』)로 보고 있었지만, 너무 탁(濁)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건강하고 젊은 야당의 구심점은 도대체 누구인가? 도대체 있기는 한 걸까? 국민들은 불안해하면서도 궁금해하고 있었다.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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