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호의 포스트 펜데믹 로드맵⑨] 인류를 가장 많이 구한 아이디어
[이종호의 포스트 펜데믹 로드맵⑨] 인류를 가장 많이 구한 아이디어
  •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인협회장
  • 승인 2021.07.24 0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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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걷잡을 수 없이 증가하자 제일 먼저 제시된 것이 손 씻기와 마스크 착용 그리고 사람 간의 악수를 자제하자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것만으로도 정말로 코로나19와 같은 악성 바이러스에 대처할 수 있느냐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이는 ‘참’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인간들이 알게 된 것은 그다지 오래된 일이 아니다. 한국의 인구 5,000만 명 중 100세 이상이 5,000명이나 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100살이 넘는다는 것이 얼마나 장수한 것인지는 청동기시대인 4000년 전 사람의 평균 수명은 겨우 18세였고 2000년 전인 서기 1세기경 로마제국 남자의 평균 수명은 약 22세였다. 1~2세기 전만 해도 30~40살이었는데 평균 수명이 그 두 배인 70~80살로 늘어난 것은 불과 100년도 채 안 된다.

한국의 경우 1900년대의 조선인의 평균수명은 20대 중반 이상, 1930년대의 평균수명은 30대 중반 이후로 알려진다. 당시에 환갑잔치를 거창하게 벌인 이유다.

한국인의 평균수명 증가는 놀랍다.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계속 증가하여 2010년 남자의 평균 수명 77.2세, 여자의 평균수명이 84세나 되더니 2018년 남성의 경우 79.7세, 여성의 경우 85.7세로 증가했다. 자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2016년을 기준으로 전세계 평균 수명 1위 국가는 89.73세의 모나코, 2위는 84.41세의 일본 그리고 3위가 83.01세의 한국이라는 통계도 있다. 다소 놀랍지만, 조만간 한국이 적어도 일본을 제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올 정도다.

세계적으로 한국인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지구인의 수명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인간의 수명이 획기적으로 증가한 배경에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 즉 소독제가 알려졌기 때문이다. 과학사상 가장 불운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알려지는 젬멜바이스(Ignas Philip Semmelweis, 1818~1865)가 등장한다.

수술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수술이 언제부터 인류의 생활에 파고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약 25,000년 전의 구석기시대의 두개골에서 외과적 수술의 흔적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전부터 수술이 행해졌던 것은 사실이다. 이 두개골은 예리한 부싯돌을 이용하여 구멍을 뚫는 수술을 했는데 놀라운 것은 수술이 성공하여 수술 후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생존했다는 점이다. 구석기인들이 왜 이런 수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대에 수술의 효과가 잘 알려졌음은 틀림없다.

여하튼 수술은 마취제의 등장으로 획기적으로 발달하여 많은 사람을 고통 속에서 구하면서 수술에는 성공했지만 수술 후의 경과가 좋지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그것은 수술 후 회복을 기다리던 환자들의 수술 부위가 곪으면서 열이 나고 통증이 생기며 여러 증상이 나타나다가 결국에는 의식을 잃고 사망하는 패혈증 때문이다. 일단 패혈증이 일어나면 죽음을 의미하므로 수술에 임하는 의사나 환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놀라운 것은 당시 수술받은 사람의 거의 70%가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이 무균처리인데 학자들은 이것이 인류를 가장 많이 구한 일등 공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균 즉 살균처리처럼 간단한 것도 없는데 놀랍게도 이런 간단한 처리는 질병 역사에서 상당히 후대에 접목된 것이다. 역으로 말한다면 이들 방법이 예전부터 알려졌다면 수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멸균이나 소독에 대한 개념은 이집트에서도 알려졌다. 이집트인들은 상처의 예방을 위해 불로 상처를 지졌는데 흉터가 남는 거친 방법임에도 이 방법은 계속됐다. 영화에서 알코올을 마시고 상처를 불로 지지는 장면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은 포도주를 소독제로 사용했다. 히포크라테스도 상처를 포도주와 식초로 소독했다고 한다.

한편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4세기에 시체가 썩을 때 나는 악취를 막기 위해 유황연기를 이용했으며 인도에서도 수술실에서 유황연기를 피웠다. 흑사병이 창궐했던 중세 유럽에서도 환자가 머물던 집이나 사용하던 물건 등을 유황연기를 이용해 소독했다.

중세시대로 내려와 프랑스의 외과의사 파레는 1537년에 난황과 테레빈유를 혼합하여 총상에 치료했는데 이는 당대에 매우 적절한 방법이다. 난황에는 항미생물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라이소자임이 들어있고 테레빈유는 화학적 소각작용을 일으키는 독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헝가리 출신 이그나스 젬멜바이스 박사[사진=위키커몬스]
헝가리 출신 이그나스 젬멜바이스 박사[사진=위키커몬스]

마취제의 활약으로 고통은 줄었지만, 패혈증이 기세를 올려 수술 자체가 극도의 기피 대상이었는데 1840년대 말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일하던 헝가리 의사 이그나스 젬멜바이스(Ignas Philip Semmelweis)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의사가 환자를 살리는 구원자가 아니라 환자를 병들게 하는 파괴자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는 의사가 불결하여 오히려 환자들에게 치명적인 병을 옮기기 때문으로 생각했다. 당시 산욕열은 유럽의 산모 중 약 10~35%의 사망률을 기록할 정도로 공포의 질환이었다. 출산 시 신생아가 산모의 좁은 산도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산모는 종종 질과 회음부가 찢어지는 상처를 입곤 한다. 출산으로 인한 상처는 저절로 아무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상처를 통해 균이 침입하면 감염과 고열을 일으키는 산욕열이 발생하는데 이는 왕족이나 귀족, 평민 구분이 없었다. 역사에서 수많은 왕비나 귀족 부인들이 아이를 낳다 사망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1820년 스코틀랜드 작가 존 맥킨토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런던 거리 모퉁이마다 무서운 질병으로 죽은 엄마들을 애도하는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비엔나 병원 산부인과 청년 의사인 젬멜바이스는 의사들로 하여금 산모를 대하기 전 소독액으로 손을 씻기만 하면 산욕열을 방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젬멜바이스는 1818년 오늘날의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출생하여 처음에는 대학교에서 2년간 법학을 공부한 후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유학하여 법학 대신 의학을 공부했고 빈에 있는 빈종합병원의 산부인과에서 근무했다.

비교적 눈썰미가 좋은 젬멜바이스는 가까이 붙어 있는 두 개의 병동에 각각 분만실이 설치됐는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제1병동에는 학문적으로 교육받은 의사들과 의대학생들이 근무하면서 아이들을 받았고 제2병동에는 교육이 별로 없는 산파들이 아이를 받았는데 제1병동보다 제2병동의 사망률이 훨씬 낮은 것이다. 의사가 전문적인 지식인임을 감안하면 제1병동에서의 산모 사망률이 제2병동보다 낮아야 했다. 젬멜바이스는 예상외의 결과에 놀라 면밀히 상황을 분석하던 중 매우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젬멜바이스의 선배 의사인 야코프 콜레츠카가 시신을 부검하던 중 실수로 입은 작은 상처 때문에 감염으로 사망한 것이다.

그는 이런 결과를 다음과 같이 유추했다.

‘선배가 부검 도중 메스를 다루다가 상처를 입은 것이 원인이 되어 사망한 것이 틀림없다. 이는 논리적으로 환자의 몸에서 나온 미지의 물질이 상처를 통해 선배의 몸속으로 들어갔고 이것의 독성으로 인해 사망한 것이다.’

그는 이를 역으로 생각했다. 산욕열은 의사로부터 산모에게 독성이 전염됐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출산한 여성은 산욕열 발생률 자체가 매우 낮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제1병동의 의사들은 시체를 만지거나 감염성 질환을 가진 환자들이 사용한 기구 등을 다루다가 아무런 조치 없이 분만실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시에는 전염원에 대한 개념은 거의 없었지만 경험적으로 전염병에 대한 지식을 가진 젬멜바이스는 1848년 제1병실의 분만실에 근무하는 의사들에게 소독을 강조했다. 물로만 씻는 것이 아니라 시체에서 묻어온 모든 물질이 씻겨나갈 때까지 염화칼슘액으로 손을 박박 씻으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설득되어 제1병동에서 소독을 시행하자 제1병동에서 제2병동보다 산욕열로 사망하는 사람의 숫자가 낮아졌다.

문제는 이런 대발견을 했음에도 젬멜바이스는 정치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자유주의의 열망이 높아지자 그는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정치적인 의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오스트리아는 젬멜바이스를 추방했다. 물론 고향인 부다페스트로 돌아간 젬멜바이스는 그곳에서도 멸균법의 우수성을 확인한 후 1861년 무균처리가 산욕열로 인한 사망률을 감소시킨다는 내용의 『산욕열의 원인, 개념과 예방』이란 책을 발간했다.

문제는 젬멜바이스가 산부인과 의사들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는 태도를 견지하자 소위 의학계에서 왕따를 당한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1865년 친구들의 손에 의해 정신병 환자 수용소로 끌려갔는데 그는 자신이 입은 손가락 상처로 인한 패혈증으로 곧바로 사망했다.

필자소개
고려대학교·대학원 졸업, 프랑스 페르피냥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 및 과학국가박사 학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에서 연구 활동
저서: 「침대에서 읽는 과학」, 「4차 산업혁명과 미래 직업」, 「로봇은 인간을 지배할 수 있을까?」, 「유네스코 선정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유적으로 보는 우리 역사」 등 10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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