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67] 파리올림픽과 프랑스혁명
[유주열의 동북아談說-67] 파리올림픽과 프랑스혁명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1.09.0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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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해 1년 늦어진 2020 도쿄올림픽과 패럴림픽이 무관중 경기로 무사히 끝났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프랑스 파리로 옮아가고 있다. 2024년 올림픽이 개최되는 파리는 33회를 맞고 있는 근대 올림픽의 발상지이다. 피에르 쿠베르탱 남작이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개최됐던 고대 올림픽을 참고로 세계인의 화합을 위한 새로운 올림픽을 제창했다. 1896년 그리스 아테네 개최에 이어 1900년 두 번째 올림픽을 파리에서 개최했다. 그 후 1924년 개최된 후 100년만의 올림픽이 된다.

이번 올림픽은 프랑스혁명의 중심 파리 도심에서 개최돼 코로나 팬데믹으로 참았던 세계인들의 파리에 대한 향수를 자극해 올림픽과 파리 관광에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다. 프랑스혁명의 원인을 제공한 루이 16세의 왕궁 베르사유궁에서 승마경기 그리고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참수된 혁명광장(콩코르드광장)에서 스케이트보드와 브레이크 댄스경기가 개최되고 나폴레옹 1세의 무덤이 있는 앵발리드에서 양궁경기 그리고 혁명 100주년의 상징인 에펠탑을 마주한 마르스 광장에서 비치 발리볼 경기가 개최되는 등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프랑스혁명의 현장이 올림픽 경기장이다.

“프랑스 사람은 세 사람만 모여도 혁명을 한다”는 말이 있다. 파리올림픽을 즐기면 자연스럽게 프랑스혁명의 역사를 느끼고 알게 된다. 자유 평등 박애를 의미하는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 그리고 “무장하라 시민들이여 대오를 갖추라, 전진, 전진! 저 더러운 피가 우리의 밭고랑을 적시도록!”으로 시작되는 국가 ‘라 마르세예즈’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터에서 왕궁을 습격해 폭군을 쓰러뜨리는 파리 현장에서 부른 마르세유 의용군의 애국과 혁명의 노래였다.

프랑스와 영국의 라이벌 관계는 지구의 구석구석에서 전쟁으로 이어졌다. 특히 1756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서 시작된 7년 전쟁은 두 나라의 재정을 파탄 나게 했다. 영국은 아메리카 식민지에 무리한 세금을 부과해 미국 독립의 도화선을 만들었고 프랑스 역시 재정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반영독립혁명을 지원했다.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루이 16세의 증세 정책이 흉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파리 시민들을 자극해 프랑스혁명이 촉발됐다.

이웃 나라 영국은 100년 전 명예혁명을 통해 의회가 왕권을 제약하는 입헌군주제가 이루어졌음에도 ‘짐이 곧 국가’라고 믿는 부르봉 왕조의 루이 14세 이후 절대왕정을 고집한 루이 16세는 시대변화의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군대를 동원했다. 볼테르, 루소 및 몽테스키외에 의해 계몽주의 사상에 눈이 뜬 파리 시민들은 과거의 억압받는 평민 계급이 아니었다. 그들은 무기확보를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1789년 7월14일(혁명기념일)이었다.

라파예트 및 미라보 등 온건지식인에 의해 입헌군주제로 혁명은 수습되는 듯했으나 루이 16세가 큰 실수를 한다. 왕비 마리앙투아네트의 오빠인 오스트리아 황제의 도움을 받아 국외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혀 급진공화주의자들에 의해 왕비와 함께 처형되는 황당한 수모를 당한다. 루이 16세와 직간접적으로 친인척이 되는 당시 모든 유럽제국의 왕실은 크게 당황해 프랑스에 무력 공격했고 혁명정부는 조국을 지켜야 했다.

공화주의자들이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혁명정부를 지배하자 성직자와 귀족들의 망명과 함께 장교들의 탈출이 이어져 프랑스군대는 지휘자 없는 오합지졸이 됐다. 이때 나타난 젊은 장교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나폴레옹 집안은 본래 이탈리아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제노바 공화국의 속령인 코르시카섬에 용병으로 이주해 살고 있었다. 제노바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감돌면서 변호사인 나폴레옹의 아버지는 독립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제노바 공화국은 나폴레옹이 태어나기 1년 전 코르시카를 프랑스에 매각해 버렸다.

나폴레옹의 아버지는 코르시카 독립의 가능성이 줄어들자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친 프랑스로 전향하고 나폴레옹을 새로운 조국 프랑스에 보내 교육을 시켰다. 배신자 집안이 된 보나파르트가는 코르시카에서 살지 못하고 마르세유로 쫓겨 이주했다. 나폴레옹은 파리의 군사학교를 졸업 16세에 포병 소위가 되고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쟁영웅으로 24세 청년 장군이 되는 벼락출세를 했다.

시민혁명 후 10년간 공화파 혁명지도자 사이의 권력 쟁탈로 나라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국민영웅 나폴레옹이 1799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5년 후인 1804년 스스로 황제(나폴레옹 1세)로 즉위한다. 전략의 귀재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전투(1805년)를 위시해 연전연승해 유럽 강대국을 차례로 굴복시켰으나, 제해권은 확보 못 해 영국을 대륙봉쇄령(1806년)으로 압박했다. 나폴레옹은 봉쇄령을 위반한 러시아를 응징하는 원정(1812년)을 감행했으나 실패하고 라이프치히 전투(1813년)에서 유럽연합군에 참패당한 후 실각, 1814년 엘바섬으로 유배된다.

이듬해 엘바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은 유럽연합군과 워털루 전투(1815년)에서 싸웠으나 다시 참패해 대서양의 절해고도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된다. 세인트헬레나섬은 수에즈운하가 완성(1869년)되기까지는 유럽과 아시아 항로의 길목에 있는 화산섬으로 나폴레옹은 1821년 5월 이곳에서 52세의 생을 마감했다. 금년은 그의 사후 200주년이 되는 해다.

한편 파리에 입성한 유럽연합군 중 러시아 장교들은 파리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1825년 12월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 실현을 위한 데카브리스트의 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해 시베리아로 유형된다. 그들이 파리에서 남긴 것은 ‘비스트로’라는 카페이다. 러시아어로 ‘빨리’에서 유래된 ‘비스트로’는 러시아 군인들이 즐겨 찾았던 주점이었다.

나폴레옹을 실각시킨 유럽의 왕정들은 프랑스를 혁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고 부르봉 왕조를 복권시켜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를 새로운 왕으로 즉위시킨다. 루이 18세가 1824년 자녀 없이 사망하고 그의 동생 샤를 10세가 왕위를 계승한다. 샤를 10세가 왕정을 반대하는 인사를 의회에서 추방하자 부르봉 왕정복고에 불만을 가진 시민들이 다시 혁명을 일으켜 샤를 10세를 퇴위시킨다. 1830년 7월이었다. 프랑스 의회는 부르봉가 방계인 오를레앙가 출신의 루이 필리프를 추대한다. 혁명을 지지하고 스스로 특권을 내려놓은 루이 필리프는 시민들의 인기를 얻어 ‘시민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루이 필리프의 치세기간(1830~1848) 중 1832년은 콜레라 창궐로 민심이 나빠져 있었다. 그해 6월 농민이 중심이 된 민중혁명이 일어난다. “너는 듣고 있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 다시는 노예처럼 살 수 없다고 외치는 소리” 뮤지컬과 영화로 우리 귀에 익숙한 6월혁명은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현장을 목격한 빅토르 위고를 감동시켜 후에 ‘비참한 민중들’이란 의미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된다. 시민의 환영을 받은 루이 필리프도 장기집권으로 왕정주의에 빠지자 6월혁명에 실패한 공화파들이 이 틈을 타서 궐기해 1848년 2월 시민왕을 퇴위시키고 공화정을 수립했다.

루이 필리프는 퇴위 전인 1840년 세인트 헬레나에 매장된 나폴레옹의 유해를 파리로 안장해 나폴레옹에 대한 향수를 불어넣었다. 이를 계기로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이 농민들 사이에 인기를 얻어 4년 단임제 대통령에 출마해 당선된다. 루이 나폴레옹은 중임 개헌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친위 쿠데타(1851년)를 일으켜 강력한 권한을 확보하고 다음해 국민투표로 신임을 얻어 스스로 황제(나폴레옹 3세)가 된다.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빅토르 위고는 나폴레옹 3세에 대해 크게 실망해 국외로 망명해 가난한 자의 진정한 혁명인 6월혁명을 중심으로 <레미제라블>을 출간(1862년)한다. 나폴레옹 3세에 쫓기는 몸인 빅토르 위고는 검열을 피해 출판사에 편지를 보내면서 “?”만 그려 보냈다. 출판사에서 답을 보냈는데 내용은 “!”였다. 출판한 책의 호응을 묻는 작가의 편지에 대단한 베스트셀러였음을 알려주는 서신이었다. 가장 짧은 왕복서신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돼 있다.

나폴레옹 3세의 대외정책은 영국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었다. 러시아에 대한 크림전쟁과 중국에 대한 제2차 아편전쟁에서 영국과 연합했고 영국의 아시아 식민지정책에 자극을 받아 인도차이나에 프랑스 식민지를 건설하고 조선과 일본에 영향력을 확대했다. 특히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의 조선파송으로 조선의 몰락한 양반을 중심으로 천주교가 전파됐다. 이에 앞서 프랑스의 피에르 모방 신부는 김대건을 마카오에 유학시켜 조선 최초의 신부를 탄생시킨 바 있다. 1866년 병인년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보려고 했던 대원군이 실망해 일으킨 병인박해 때 수많은 조선의 천주교 신도와 함께 9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희생됐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 소식은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나폴레옹 3세의 국내 치적의 하나는 유진 오스만 남작을 파리 시장으로 임명해 파리를 오늘날 같은 세계의 수도로 만든 것이다. 사실 중세도시 파리의 꼬불꼬불한 미로가 혁명을 유발시키기 좋아 이를 개조한다면 군대투입이 유리해 혁명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 나폴레옹 3세의 숨은 의도였다고 한다. 파리 개선문을 중심으로 방사선 형 불바르(대로)와 녹지대는 기병대의 긴급출동이 가능하고 군대를 주둔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도시개조에 따라 그 이후로는 혁명의 성공이 어렵게 된다. 보불전쟁의 전후처리에 불만을 가진 파리 시민들이 1871년 3월 사회주의 자치정부(파리코뮌)를 세웠으나 정부의 조직적인 진압작전으로 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2개월 만에 혁명이 실패한 것도 파리개조에 있었다고 본다.

파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6~7층 높이에 베이지색의 오스만 스타일 건물은 어둑한 골목길을 밝히고자 1층에 노천카페 2층 이상은 주거용으로 했다. 이러한 일률적 건물을 짓기 위해 많은 옛 건물을 철거 정리했다. 오늘날 중고품 노천시장인 벼룩시장도 이 무렵 수많은 건물이 헐리게 돼 많은 사람이 이사를 하게 되고 실제 벼룩이 들끓는 가구, 침구, 옷 등이 판매되는 데서 시작됐다고 한다.

19세기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재위 기간이 최고의 전성기였으나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1세가 일으킨 보불전쟁(1870~1871)에 참패하여 나폴레옹 3세가 이름값도 못 하고 백기 투항 10만 장병과 함께 포로가 되는 치욕을 맞게 된다. 이 기회에 나폴레옹 3세의 제정에 불만을 가진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황제는 퇴위당하고 프랑스는 새로운 공화국이 됐다.

파리를 점령한 빌헬름 1세가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방에서 초대 독일 제국 황제로 즉위하고, 30년 종교전쟁의 결과로 프랑스에 복속됐던 알자스 로렌지역이 220여년 만에 독일제국의 영토로 되돌려 받는다.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퇴위로 제정은 끝나고 1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대통령제를 중심으로 하는 공화정이 유지되고 있다.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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