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65] 두류산(頭流山) 양단수
[유주열의 동북아談說-65] 두류산(頭流山) 양단수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1.07.08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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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건국 100여년 후인 1501년 경상도에서는 두 명의 대학자가 탄생했다. 그해 음력 6월, 두류산(지리산) 동쪽 합천 삼가에서 남명 조식 그리고 5개월 후 청량산에서 멀지 않은 안동 온계에서 퇴계 이황이 태어났다. 낙동강을 경계로 좌퇴계 우남명은 한 번도 서로 만나지 못했지만, 동갑내기 라이벌 관계로, 사람들은 남명의 기품이 두류산처럼 우뚝했다면 퇴계는 온화한 청량산을 닮았다고 했다. 금년은 두 분 탄신 520주년이 되는 해다.

남명은 동시대의 퇴계와 비견되는 학문을 이루었음에도 우리가 천원 지폐에서 자주 만나는 퇴계에 비해 인지도가 낮다. 실천을 중시하고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남명의 학맥이 인조반정을 기점으로 끊어지다시피 한 반면 성리학이론을 심화시킨 퇴계의 주변에는 뛰어난 제자가 많았다.

선비사상을 상재(商才)와 연결시켜 글로벌 기업으로 크게 성공한 삼성 및 LG 등의 창업주가 경상우도에서 배출된 것은 지식은 실천으로 완성된다는 남명의 가르침이 전해 내려왔기 때문인지 모른다.

남명의 집안은 본래 한양(漢城, 서울)의 명문가였다. 증조부가 합천삼가에 내려와 한양과의 인연이 일시 단절됐지만 아버지 조언형이 장원급제로 벼슬길에 오르자 남명 5세 때 전 가족의 한양생활이 시작됐다. 글공부를 아버지로부터 시작한 남명의 어린 시절은, 고향에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한 퇴계에 비해 유복했다.

남명의 가족이 처음 자리 잡은 곳은 한양의 동부 연화방이었다. 연화방은 창경궁과 낙산 사이의 명문 사대부 주거지역으로 지금의 연건동과 원남동 일부이다. 남명의 이웃집에는 후에 병조판서 영의정을 지낸 이준경 이윤경 형제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남명의 죽마고우로 만나 한평생 친구이자 후원자였다.

일제는 낙산 일대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고 창경궁과 낙산 사이에 큰길을 내고 대학병원을 지어 과거의 모습을 알 수 없는 데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낙산의 아름다움도 찾아볼 수 없다. 남명은 이준경 형제들과 해발 125m의 낙타봉 아래 맑은 계곡과 산림이 우거진 낙산을 오르고 ‘마뫼’라고 불렀던 지금의 남산에도 수차 올라 호연지기를 키웠다.

남명의 아버지는 당시 엘리트 코스인 사헌부와 사간원 근무를 마치고 함경도 단천군수로 부임했다. 남명은 한양과 단천을 오가면서 민족의 명산 금강산과 원산의 명사십리 그리고 푸른 동해 바다를 통해 아름다운 조선의 강산을 실감하면서도 변방에 사는 백성들의 고달픈 삶도 보았다. 또한 단천 현지에서 아버지 친구들로부터 천문지리 궁마 등 다양한 지식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북방여진의 내침과 정벌의 역사도 알게 되는 등 세상을 보는 안목과 자신감을 키웠다.

3년간의 지방관을 끝낸 아버지가 내직으로 영전함에 따라 이번에는 북악산 아래 장의동으로 이사를 한다. 지금의 청운 효자동 지역이다. 장의동은 서쪽으로 인왕산이 버티고 있고 임금이 사는 경복궁이 바로 이웃이다. 장의동 남명의 집근처에는 왕족과 명문가 자제가 많았다. 조선조 후기 세도가 안동 김씨들이 몰려 살면서 이곳의 안동 김씨를 장(의)동 김씨라고 부르기도 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제색도>로 당시의 인왕산 모습을 엿볼 수 있는데 해발 325m의 인왕산은 호랑이가 출몰하는 산이라고 할 정도로 산세가 깊고 험했다. 인왕산 북쪽 자락 지금의 종로구 부암동에는 기암괴석이 많아 세종대왕의 3남 안평대군의 별서 무계동이 있었다.

안평대군이 어느 날 꿈에서 본 무릉도원을 화가 안견으로 하여금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한 후 스스로 인왕산의 외진 골짜기에 복사꽃 만발한 자신의 무릉도원을 조성해 무계동(무릉계곡)이라고 부르고 무계정사를 지었다. 안평대군은 이곳에서 당대 최고의 선비들과 학문을 논하고 시를 즐겼다고 한다. 1453년 한 살 터울의 형인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에 안평대군이 역모로 희생되면서 무계정사는 파괴되고 무계동은 폐허가 됐다.

남명이 친구들과 무계동 절간에서 독서할 때 당시의 모습은 간데없고 바위에 새겨진 ‘무계동’이라는 안평대군의 글씨만 남아있었다. 남명은 무계정사와 <몽유도원도>를 통해 안평대군의 이상향 무릉도원을 일생 잊지 않았다.

신진 사림 출신으로 중종의 신임을 받고 혜성처럼 나타나 급진적 개혁정치를 한 조광조가 훈구파 반정공신들에 의해 배척되는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조광조의 제자로서 출사한 선비들이 주초위왕(走肖爲王)의 모함에 대역죄인이 된 스승과 함께 풍비박산되고 일부는 뿔뿔이 흩어져 숨어드는 시기였다. 장의동의 친구인 성우·성운 형제의 사촌 성수침도 인왕산 청풍계에 숨어 지내면서 남명의 친구가 돼 종유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어려운 과거에 급제해 앞날이 촉망되던 선비들이 사화에 말려들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가자 과거보다는 조용히 학문에만 정진하는 선비들이 많았다. 전라도 담양에 양산보라는 선비가 조성한 은자의 정원이 있다. 그 역시 스승 조광조의 죽음을 보고 현실 정치에 물러나 소쇄원을 짓고 평생 은둔 생활을 했다.

남명의 집안도 기묘사화를 피해 가지 못했다. 문과 급제한 숙부가 조광조 일파로 몰려 귀양 도중 목숨을 잃었고 승문원 판교였던 아버지도 파직된 후 병을 얻어 1526년 58세로 세상을 떠난다. 남명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자 오랜 한양 생활을 접고 선영이 있는 삼가로 내려간다. 남명이 한양을 떠난 후에, 지방 향시에서 진사시를 통과한 퇴계는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입학함으로써 한양생활이 시작됐다.

삼가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난 후 남명은 김해의 부호인 처가로 내려가 학문에 매진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친다. 기묘사화를 현장에서 목격한 남명은 벼슬길에 환멸을 느껴 과거를 단념하고 산림처사로서 정통유학뿐만이 아니라 노장사상 등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해 학문의 깊이와 폭을 넓혔다.

이 무렵 ≪장자≫에서 취한 ‘남명(南冥)’이란 호가 예사롭지 않다. 남명은 한 번의 날갯짓으로 구만리 창공을 나는 대붕(大鵬)이 다다르는 ‘남쪽바다’로 세속의 욕망에 찌든 북명(北冥)과 달리 모든 권력욕에서 벗어난 이상향이었다.

18년간 김해에서 닦은 학문의 명성으로 영남의 거유가 된 남명이 왜구가 출몰하는 남해안 바닷가에서 살았던 경험은 함경도 단천 생활과 함께 당시 일반 선비들이 가지지 못했던 특별한 안보관을 형성해 주었다. 조선의 국태민안(國泰民安)은 북으로 여진족의 침범에 대비하고 남으로 왜구의 노략질을 막는 데서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남명은 제자들로 하여금 투철한 호국관과 함께 왜구 방비대책을 주문해 남명 사후 20년이 지나 일어난 임진왜란 때 활약한 구국의 의병장 대부분은 남명의 문하생이었다.

남명이 48세 때 고향의 어머니 인천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삼가로 돌아와 선영을 지켰다. ‘조용히 있다가도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우레처럼 소리친다’는 ≪장자≫의 가르침이 깃든 뇌룡사(雷龍舍)를 지어 학문과 제자양성에 정진하고 있는 남명에게 명종은 단성현감을 제수했다. 1555년 을묘년이었다. 남명은 이를 사직하면서 외척정치의 폐단으로 민심이 떠나고 내우외환으로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현실에 대해 칼날 같은 상소를 올려 정계를 뒤흔들었다.

“전하의 국사는 잘못돼 나라의 근본이 무너지고 하늘의 뜻과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백년 된 큰 나무에 벌레가 속을 갉아 먹고 진액은 모두 말라 사나운 비라도 닥쳐오면 곧 쓰러질 지경입니다. (중략) 자전(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다고 하지만 궁중의 한 과부(一寡婦)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어리시어 선왕의 외로운 한 아드님(一孤嗣)에 불과합니다. (중략) 지난번 왜노가 치욕스러운 짓(을묘왜변)을 하였건만 왕의 위엄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세종께서 대마도로 왜구를 정벌(南征)하고 성종께서 함경도 여진을 무찌른(北伐) 것을 보아도 오늘과 같은 일이 있었습니까.”

‘을묘사직소’ 또는 ‘단성소’로 알려진 남명의 죽음을 무릅쓴 우레와 같은 상소는 듣기에는 불편해도 구구절절 옳은데다가 남명이 퇴계 못지않은 당대 최고의 대학자였기에 노발대발 화를 낸 명종도 어쩌지 못했다. 오히려 10여년 후 명종은 남명의 기개와 절조를 기억하고 한양으로 불러 학문과 정치의 도를 논하면서 벼슬을 다시 제수했다. 남명은 여전히 사양하고 죽마고우들을 오랜만에 재회한 후 한양을 떠났다.

남명은 인왕산 무계동에서 이루지 못한 안평대군의 무릉도원을 기억하고 조선의 삼신산 방장산(두류산)을 수차례 등산해 드디어 한곳을 찾아냈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듣고 이제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비치구나 아헤야 무릉도원이 어디냐 나는 옌가 하노라”

1561년 남명은 두류산에서 흘러나오는 양단수가 화살처럼 흐르고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지금의 산청군 시천면 덕천동에 산천재를 짓고 제자를 부른다. 이곳은 남명이 대붕이 되어 날라와 환갑의 나이에 다다른 자신의 이상향 ‘남쪽바다’였다.

남명은 어떠한 벼슬도 거부하고 경(敬)의 마음과 의(義)의 몸가짐으로 평생을 처사로 보내다가 퇴계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지 1여년 후인 1572년 72세의 나이에 눈을 감는다.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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