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만주⑫] 신팔균 순국지: 어느 독립군 부부의 비통한 사연을 전하다
[아! 만주⑫] 신팔균 순국지: 어느 독립군 부부의 비통한 사연을 전하다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승인 2022.01.06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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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삼성으로 불리는 중국 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가 곳곳에 있다. 의병운동,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지사들이 고민과 피가 어린 곳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 사적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신팔균(申八均, 1882~1924)과 임수명(林壽命, 1894~1924)
신팔균(申八均, 1882~1924)과 임수명(林壽命, 1894~1924)

이슥한 밤, 저 멀리서 총소리가 요란하다. 한 무리의 일본 헌병이 독립군을 쫓는다. 독립군은 총탄에 맞아 비틀거린다. 숨을 곳이 필요하다. 다행히 불 켜진 병원이 보인다. 그곳으로 서둘러 들어간다. 당직을 서던 간호사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하지만 독립군임을 금방 알아챈다. 간호사는 독립군을 시체보관소로 인도한다. 독립군은 조용히 몸을 누인다. 곧바로 일본 헌병이 병원에 들이닥친다. 이곳저곳을 헤집으며 독립군 색출에 혈안이다. 간호사는 일본 헌병을 단호히 돌려보낸다.

적막이 흐르자 독립군이 병원을 나서려 한다. 간호사는 그를 막아선다. 그리고는 응급 치료를 한다. 그렇게 독립군은 목숨을 부지한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연인이 된다. 결혼을 하고 자녀도 낳는다. 그러나 중국 땅에서, 두 사람은 함께 독립운동을 벌이며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독립군이 적의 총탄에 맞고 숨을 거둔다. 간호사는 비보를 접하고, 차마 견디다 못해 음독자살을 한다. 주변 사람들은 말없이 눈물만 훔친다.

독립군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의 에피소드로 치부할 만하다. 그러나 이는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다. 여기서 독립군은 지청천(池靑天), 김경천(金擎天)과 함께 남만주를 호령했던 ‘삼천(三天)’ 중 한 분인 신팔균(이명; 申東天) 장군이며, 간호사는 그의 부인 임수명(林壽命) 여사이다. 그들에게 나라는 어떤 존재였던가? 그리고 독립은 어떤 의미였던가? 100년 전 한 나라의 비운과 한 가정의 비극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한 번쯤은 되새길 필요가 있는 화두인 것 같다.

충북 진천군 이월초등학교(전 보명학교)의 신팔균 사적비
충북 진천군 이월초등학교(전 보명학교)의 신팔균 사적비

대한제국의 정통 군인이었으나 군대 해산 후 낙향하여 구국운동 전개

신팔균(申八均, 1882~1924)은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이다. 고조부 신홍주(申鴻周)는 훈련대장을, 증조부 신의직(申義直)은 부사를 역임했다. 조부 신헌(申櫶)은 어느 문인 못지않은 유장(儒將)으로서 삼도수군통제사와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백부 신정희(申正熙)는 형조판서와 어영대장을, 부친 신석희(申奭熙)는 병마절도사와 한성부판윤을 거쳐 중추원 일등의관을 역임했다. 온 집안이 대대로 무사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신팔균은 1900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육군 참위(參尉)를 거쳐 1903년에 시위대(侍衛隊)에 차출된다. 시위대의 임무는 황실 호위였다. 그렇기에 당대 최고의 정예병으로 구성했다. 집안의 영향이 없지 않았지만, 신팔균의 무예와 충의가 남달랐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1907년에 일제가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황실 시위대도 허울뿐인 군사 조직으로 전락했다. 신팔균은 퇴역하고 낙향했다. 그리고 민족정신 함양과 항일의식 고취를 목표로 보명학교(普明學校, 현 진천군 이월초등학교)를 설립하여 구국운동에 발을 들였다.

신팔균의 구국운동은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 활동으로도 이어졌다. 대동청년단은 1909년에 신민회 소속 청년들이 신민회의 이념에 따라 국권 회복을 모색하고자 조직한 비밀결사 단체였다. 신팔균은 대동청년단의 젊은 회원들과 함께 신사상을 교류하며 구국의 힘을 결집하고자 했다. 그러나 1910년에 한일합방이 이루어졌다. 대한청년단의 젊은 회원들은 해외로 나아가 항일투쟁을 모색했다. 조선총독부의 달콤한 유혹과 집요한 감시가 따랐기도 하거니와, 이러한 혼돈 속에서 신팔균은 만주로 향했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신팔균의 졸업 증서(1903. 09. 20)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신팔균의 졸업 증서(1903. 09. 20)

만주에서는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북경에서는 군무위원장으로 활동

망명 초기에 신팔균은 만주와 국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누대로 내려오던 진천군 평산 신씨 고택을 저당 잡히기도 했다. 나라가 바로 서야 집안도 바로 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18년부터 지청천, 김경천과 더불어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서 지청천, 김경천 및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으로서 신팔균의 참여는 신흥무관학교를 더욱 활기차게 만들었다. 생도들은 이들 세 명의 교관을 “남만(南滿)의 삼천(三天)”이라 칭하며 그 본(本)을 좇았다.

신흥무관학교의 명성이 높아지자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었다. 1920년 5월부터 관련한 애국지사와 가족들을 체포했다. 게다가 1920년 6월 봉오동에서 대패한 일본군이 양민 학살과 독립군 초토화 작전을 강화했다. 더 이상 신흥무관학교를 유지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그러자 신팔균은 북경으로 몸을 옮겨 한교교육회(韓僑敎育會)를 건립했다. 한교교육회는 경신참변으로 인해 고아가 된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단체였다. 경신년에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목격했기도 하거니와 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무장투쟁 못지않게 중요한 독립운동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또한 신팔균은 국민대표회의 창조파로 활동했다. 1923년 개별 독립단체의 통합을 위해 북경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으로 결렬되고 말았다. 개조파는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지도부로 존속시키고 점진적으로 개조하자는 입장이었고, 창조파는 임시정부의 외교론을 비판하며 무장투쟁을 위한 새로운 지도부를 설립하자는 입장이었다. 결국 창조파 단독으로 내무, 외무, 재무, 군무, 경제 등 임시정부와 체제가 전혀 다른 신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신팔균을 군무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신팔균은 둔전제(屯田制)에 입각한 군사교육을 실시했으며, 별동대를 두고 일제의 주요 기관 파괴 및 주요 인사 암살을 주도했다.

진천군 평산 신씨 고택(충북 진천군 이월면 논실안길 58-1)
진천군 평산 신씨 고택(충북 진천군 이월면 논실안길 58-1)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으로서 독립군의 사기와 역량을 급속도로 진작

1922년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광한단(光韓團) 등이 요녕성 환인현를 거점으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했다. 개별 독립운동단체들이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한 쾌거였다. 나아가 2개월 후에는 관전한교민단(寬甸韓僑民團), 대한광복군영(大韓光復軍營), 대한정의군영(大韓正義軍營), 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總營) 등이 가세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했다. 산하에는 민사, 교섭, 군사, 재무, 학무, 법무, 교통, 설업 등 부서를 두었다. 일종의 정부 형태였으며, 관할 지역은 환인현을 비롯하여 통화, 집안, 관전, 흥경, 유하, 임강, 장백 등이었다.

그러나 거대 조직이었던 만큼 알력도 따랐다. 조직이 해체될 위기까지 치달았다. 조직 개편이 시급했다. 이때 신팔균이 군사위원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일제는 대한통의부를 남만주의 한인을 지배하는 독립단으로 규정했다. 또한 무력을 1천명 이상으로 추정하여 주시했다. 그러면서도 소속 군인들을 “단지 생계를 위해 가입한 무식한 자들이며, 하등의 방침도 없는 조선의 마적으로서 살육과 강도 등을 일삼아 사회에 미치는 해독이 심대하다”라고 평가했다. 다소 악의적인 평가이지만, 군사위원장으로서 신팔균이 해결해야 할 책무가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신팔균은 군대의 기강을 바로 잡아 항일투쟁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매진했다. ‘대한통의부 비상회의 의결사항’을 한 사례로 꼽을 수 있는데, 신팔균이 의용군 장교들로부터 대한통의부에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 하겠다는 결의를 이끌어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팔균에 대한 신뢰와 충성이 아니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신팔균은 군사력을 수시로 점검하며 자질이 부족한 군인을 따로 선별하여 군사 훈련을 진행했다. 결과 대한통의부 의용군의 질적 역량이 갈수록 높아졌다. 군사들은 일본 정규군과 교전에도 자신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신팔균 순국지(중국 요녕성 신빈만족자치현 왕청문 홍승저수지)
신팔균 순국지(중국 요녕성 신빈만족자치현 왕청문 홍승저수지)

군사 훈련 중 일제의 기습공격으로 순국, 그의 부인도 희망 잃고 자살

1924년 7월2일, 신팔균은 신빈현(新賓縣) 왕청문(旺淸門) 이도구(二道溝)의 산악지대에서 군사훈련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마적 300여 명이 느닷없이 기습공격을 가했다. 전혀 예상 밖의 상황이었다. 황급히 전열을 갖추고 교전했다. 그러나 탄환 부족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선두에서 지휘하던 신팔균의 가슴에 탄환이 날아들었다. 신팔균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향년 42세였다. 독립신문(1924.07.24)과 동아일보(1924.08.10)는 이 사건을 ‘흥경사건’ 또는 ‘이도구사변’이라 하여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 신팔균의 순국을 대서특필했다.

그 당시 부인 임수명은 만삭의 몸으로 북경에 머물고 있었다. 두 사람은 1912년에 극적으로 만나 1914년에 결혼했다. 임수명은 신팔균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에서 두 아들을 낳아 길렀다. 신팔균이 북경과 만주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사이, 임수명은 자녀들의 양육은 물론 군자금 모금, 비밀문서 전달 등 독립군을 후원하는 역할을 했다. 신팔균의 군사들은, 차마 비보를 전할 수 없었다. 대신 순산을 핑계로 임수명을 귀국시켰다. 그러나 막내딸을 낳은 지 넉 달 만에 임수명이 남편의 순국 소식을 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즈음에 둘째 아들마저 잃었다. 임수명은 절망했다. 결국 막내딸과 함께 음독자살을 선택했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얼마 후에는 이름 모를 병으로 장남마저 사망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신팔균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임수명 여사의 공훈도 기려 1977년에 건국포장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신팔균의 흔적은 만주에서 찾아볼 수 없다. 흥경사건이 벌어진 일대는 저수지(왕청문 홍승저수지)로 변했다. 2019년에 한중교류문화원(중국 요녕성 심양시 소재)이 주도하여 신팔균 순국 기념비를 건립하려 했으나, 신빈현 문물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지 못했다. 부연컨대 신팔균은 대한제국의 육군 장교로서 북경과 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국가라는 외형은 망했으나, 그 정신은 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한 당대 최고의 무사였다. 비록 유형의 기념비는 없지만, 무형의 정신만은 잊지 말아야 하겠다.

신팔균 복장 전시 관람(독립기념관 겨레의 집, 2019. 08. 15)
신팔균 복장 전시 관람(독립기념관 겨레의 집, 2019. 0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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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경 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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