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78] 박명원과 열하일기
[유주열의 동북아談說-78] 박명원과 열하일기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2.08.05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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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덕 피서산장

수년 전 전라남도 나주에 갈 기회에 조선조 왕족 집안에다 명문가인 반남 박씨의 본관 반남면을 찾았다. 반남 박씨의 시조 박응주가 고려조 때 반남의 호장(戶長, 지방호족)이 되면서, 반남 박씨의 시조가 됐다고 한다. ‘벌집 명당’이라는 박응주의 묘소를 가보지 못했지만 야사에는 그의 후손들이 벌처럼 일어난 것은 그 명당과 관계가 있다고 전한다.

TV 드라마에도 가끔 나오는 박응주의 후손 박은은 조선조 태종 때 좌의정을 지냈는데 후에 세종의 장인이고 태종의 사돈인 심온 가문을 몰락시키는데 한몫을 했다. 한이 맺힌 심온이 반남 박씨와는 통혼도 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로 청송 심씨와의 악연도 있었다고 한다.

조선조 왕비 배출 집안으로 여흥 민씨를 꼽는다면 부마(왕의 사위) 배출 집안으로 반남 박씨가 빠지지 않을 것 같다. 철종의 부마 박영효를 포함 5명의 부마를 배출했다. 그중 영조의 부마로 박명원(1725-1790)이 있었다.

영조는 궁인 정빈 이씨로부터 장녀 화억공주, 장남 효장세자, 차녀 화순옹주를 얻었다. 장녀는 1년 만에, 장남은 9세에 요절했으나 차녀는 성장해 월성위 김한신에 출가 추사 김정희의 증조모가 된다. 정빈 이씨가 27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한 후 영조가 영빈 이씨를 통해 얻은 첫 딸이 화평옹주였다. 효장세자 사후 왕자를 바라는 영조에게 영빈 이씨는 5명의 옹주를 줄줄이 낳고 왕자를 탄생시키니 그가 사도세자였다.

박명원은 1738년 화평옹주와 결혼 금성위로 봉해졌다. 영조는 총애하는 화평옹주의 혼례를 성대히 치른 후에 궁궐 안에 4년간 거주토록 허락했다. 당시 영조가 살고 있던 궁궐은 경덕궁(慶德宮)으로 동궐인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서궐로 불리었다. 경덕궁이 들어서기 전에 이곳은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집이었는데 왕기가 서려 있다는 풍수설을 믿은 국왕 광해가 이복동생 정원군의 집을 몰수 새 궁궐을 지었다.

풍수설이 맞아서인지 정원군의 아들이 반정을 통해 광해를 몰아내고 인조가 됨에 따라 아버지 정원군은 추존왕 원종에 경덕(敬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760년 영조는 경덕궁이 원종의 시호와 발음이 같다 하여 경희궁(慶熙宮)으로 개명한다. 지금의 경희궁은 보잘것없지만, 옛 경희궁은 새문안로 대부분이 포함되고 구세군 중앙회관에 이르는 거대한 궁역으로 대한제국 선포 후 확장된 경운궁(덕수궁)과는 석조 홍교가 놓일 정도였다. 경희궁에는 정전을 위시하여 100여 동의 전각이 들어차 철종 때까지 조선 국왕은 동서 양궐을 오가며 거주하는 이른바 양궐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은 왕권 강화라는 명분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희궁에 있던 수많은 전각을 헐어 이축함에 따라 경희궁은 본래의 모습을 잃기 시작했다. 그 후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통감부중학(경성중학)을 세우면서 그나마 남아 있는 전각들이 외부에 매각되었고 1914년 새문안길이 개통되면서 궁역도 크게 축소되고 궁궐의 모습은 대부분 사라지게 됐다.

금성위 박명원 부부가 경덕궁을 출궁 사가에서 지낸 지 6년 만에 화평옹주가 세상을 떠났다. 영조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어명에 의해 국장에 버금가는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영조는 딸이 죽은 후에도 박명원에 대한 총애를 거두지 않았다고 한다.

1776년 영조가 승하하고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한 정조가 왕위를 계승했다. 정조는 1780년 고모부 되는 박명원을 청의 건륭제 칠순만수절 진하사(進賀使)로 임명했다. 연 1회 파견되는 정기 사행(冬至使)이 아닌 청황실의 특별 경사를 축하하기 위한 임시사절이었다.

조선시대 외교정책의 근간은 사대와 교린으로 중국(명·청)에 대해서는 사대정책을 일본의 경우 교린정책을 취했다. 명나라에 조천사(朝天使), 청나라에 연행사(燕行使), 일본에는 통신사(通信使)라는 이름으로 사절단을 파견했고 사절단장의 벼슬에도 차이를 두었다.

사절단 3사(정사·부사·서장관)의 경우 자제군관(子弟軍官)의 이름으로 시중을 들 개인 수행원을 데리고 가도록 했다. 그들에게는 별도의 임무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했다.

박명원은 자신의 자제군관으로 집안의 영재로 문장력이 탁월한 8촌 동생 박지원을 선임했다. 박지원(1737-1803)은 총명하지만 논어의 불사무의(不仕無義, 벼슬하지 않으면 의로움도 없다)에도 불구하고 제도에 얽매이는 벼슬아치가 되고 싶지 않아 과거를 기피했으나, 신분과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사람들과 즐겨 만나면서 자유인으로서 삶을 즐기고 있었다. 특히 중인계급인 역관들과도 교류하여, 청나라는 오랑캐로 정벌할 대상(北伐)에서 배워야 할 대상(北學)으로, 즉 명분에서 실용의 접근을 주장했다. 양난(임진·병자) 이후에도 조선조 대다수 명문 집안이 주자학에 몰입되어 있을 때 반남 박씨 집안은 실학(實用之學)을 통한 사회개혁에 관심을 가져왔다. 박지원이 이러한 집안의 영향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 무렵 중국의 정세는 바뀌고 있었다. 1636년 조선을 침략 병자호란을 일으켜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에게 삼전도 굴욕을 안긴 청태종 홍타이지는 1643년 급사했다. 그의 아들 순치제가 숙부 도르곤(예친왕)의 도움으로 1644년 산해관을 넘어 베이징(燕京)을 점령했다. 순치제는 자금성에서 명(明)에 이어 천명을 받은 새로운 천자(受命天子) 임을 선언했다. 그는 중국대륙 통치를 위해 강경책과 유화책을 통해 내치를 다지고 아담 샬 등 선교사를 등용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다. 청나라는 순치제 이후 강희-옹정-건륭 등 3대에 걸친 140년의 성세(盛世)를 구가하며 이미 풍요로운 선진국이 되어 있었다.

박명원은 친화성이 좋은 박지원이 중국인을 직접 만나 다양한 청나라의 문물을 꼼꼼히 기록하고 그들의 변화 배경을 탐구할 적임자로 생각했다. 더욱이 청나라에는 초기 문금(門禁) 정책(사절단이 숙소 밖 외출을 금지하는 정책)이 완화되어 비교적 자유롭게 현지를 돌아다닐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정조 즉위 초 세도가 홍국영을 피해 개성에서 멀지 않은 황해도 연암골에 숨어지내던 박지원에게는 홍국영의 실각과 연행사 선임 소식에 기뻐했다. 그는 이전에 나온 수많은 연행록을 모두 읽었다. 조선조 500년에 명·청 사절단은 800회로 일본의 통신사 12회에 비교 안 되는 횟수였다. 박지원은 44세로 일반 자제군관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그만큼 생각이 정리되고 준비를 더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선 지식인 사회에서는 호운불백년(胡運不百年)이라 해서 오랑캐 운세는 100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믿음으로 청나라를 폄훼하고 있었다. 박지원은 중국을 누가 지배하고 있느냐 보다 중국의 실체를 알고 우리가 무엇을 배울 것이냐에 관심을 가졌다. 그가 압록강을 건너,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요동 벌판을 보고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갓난아이가 크게 울 듯이 시원하게 통곡하고 싶어 했다. 좁은 반도 출신으로서 느껴보지 못했던 광활한 대지에 대한 감동이었다.

건륭제의 칠순일은 음력 8월 13일이었다. 사절단은 그날에 맞추어 베이징에 도착했으나 주인공은 250km 떨어진 열하(熱河)에 있다는 것이다. 황제는 조선사절단을 열하로 부르고 있었다. 기진맥진한 박지원은 정식 사절단이 아니기에 베이징에 남아 쉬면서 구경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정사 박명원은 열하를 가지 않으면 천하를 볼 수 없다면서 동행을 권해 박지원은 마지 못해 열하 강행군에 합세했다. 박지원은 조선사절단으로는 어느 누구도 가본 적이 없는 ‘뜨거운 강’ 열하로 가게 됐고 다녀와서는 흔한 ‘연행록’이 아닌 ‘열하일기’라는 색다른 타이틀로 세간의 관심을 끌면서 베스트 셀러가 될 수 있었다.

피서산장 편액[사진=위키백과]

건륭제의 조부 강희제는 남으로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북방에는 몽골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자 지도자들을 베이징으로 불러 환대하는 등 회유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청초 베이징은 천화(天花, 천연두)가 창궐했다. 순치제가 천화로 사망했고 강희제도 어릴 때 감염되어 기적적으로 회복됐지만 얼굴에는 흉터가 남았다. 몽골의 왕공과 귀족들은 천화를 두려워하여 베이징에 오는 것을 꺼렸다. 강희제는 몽골과 가까우면서 천화가 없는 깨끗한 장소를 찾아야 했다. 전략적 요충지로 사냥하기 좋으며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온천물이 샘솟는 열하가 적지였다.

1703년 강희제는 열하에 행궁을 지어 몽골 귀족을 맞이하고 여름철 화로처럼 뜨거운 베이징을 벗어나 대신들과 피서 겸 업무처리를 하였다. 열하가 제2의 수도(副都)가 된 것이다. 강희제 사후 1733년 그의 아들 옹정제는 부황이 베푼 은혜를 받든다는 의미로 서경에 나오는 승수덕택(承受德澤)의 두 글자를 따서 승덕(承德)이란 새로운 지명을 사용했다.

박지원 일행이 열하행궁을 찾았을 때 그곳의 이름이 이미 승덕으로 바뀌어 있었고 하절기 6개월의 황제 거주지는 하도(夏都) 승덕이라는 것은 상식으로 되어 있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동짓날 전후 떠나는 정기사행 동지사의 경험으로 황제는 항상 베이징에 있는 것으로 오산하여 일정을 잘못 짚었던 것 같다. 그들이 베이징에 도착한 후 만수절(8.13)에 다시 맞추느라 부랴부랴 열하를 향해 장성을 넘고 수많은 강을 건너 무박 4일의 강행군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박지원이 한성을 떠나 두 달여 만에 베이징에 도착했고 다시 수일 걸려 열하에 갔지만 지금은 서울을 떠나 항공기로 두 시간여에 베이징에 도착하고 고속도로를 통해 수 시간 만에 열하(승덕)에 갈 수 있게 됐다. 필자는 베이징 대사관 근무 시 수차례 승덕의 열하행궁을 다녀왔다. 행궁 입구에는 ‘피서산장’이라는 강희제 친필 편액이 걸려 있다. 갈 때마다 확인하지만 ‘피(避)’ 자가 우리가 아는 글자와 다르다. ‘피’ 자에 매울 신(辛)이 들어 있어야 하는데 황제가 머무는 행궁에는 용납 안 된다 하여 신 자에 가로획을 하나 더 보탠, 박지원도 눈치 못 챈 것으로 보이는 특이한 글자가 되어 있다.

열하에 대한 기록은 10년 후 건륭제의 팔순 만수절에 다녀간 서호수(1736-1799)의 ‘열하기유’도 있지만 세계적 여행기로 인정받고 한국인의 기록문화를 잘 보여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그의 팔촌 형 금성위 박명원이 아니었다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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