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79] 마르코 폴로와 쿠빌라이
[유주열의 동북아談說-79] 마르코 폴로와 쿠빌라이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2.09.06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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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왼쪽)와 쿠빌라이 칸[사진=위키피디아]
마르코 폴로(왼쪽)와 쿠빌라이 칸[사진=위키피디아]

베이징 대사관 근무 시절 중국의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장쩌민 전 국가주석의 출생지이기도 한 양저우(揚州)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양저우는 대운하와 창장(長江)이 만나는 곳으로 물류의 중심지이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남쪽의 풍부한 물산을 북쪽의 백만대군에게 보급하기 위해 건설했다고 한다.

수양제가 고구려 정벌에는 실패했지만, 양저우를 강의 도읍지(江都)로 우대했고 그의 무덤도 양저우에 있다. 당나라 때에는 양저우에 이슬람, 신라, 일본 등 많은 외국인이 거주하여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추었다. 당나라가 외국인 인재를 발탁하는 빈공과를 설치, 급제한 사람을 양저우 지방관으로 임명한 것도 이곳에 사는 외국인 관리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빈공과에 급제한 신라의 최치원이 양저우 지방관 생활을 하면서 ‘계원필경’이라는 문집을 냈는데 계원(桂苑)은 양저우의 옛 이름이다. 그로부터 400년 후 쿠빌라이가 마르코 폴로를 이곳의 지방관으로 임명했다.

양저우시는 2007년 한중수교 15주년을 맞아 ‘최치원 기념관’을 건립하고 2011년에는 ‘마르코 폴로 기념관’을 개관했는데 그때 초대된 사람은 뜻밖에 전 크로아티아 대통령이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인으로 알고 있던 마르코 폴로의 출신지는 아드리아해 동쪽 크로아티아 달마티아의 코출라 섬이었다고 한다. 마르코 폴로의 성(姓) 폴로(Polo)는 달마티아에서 발견되는 조류의 이름이다. 코출라 섬에는 그의 생가를 찾는 관광객이 넘친다고 한다. <동방견문록>으로 유명한 마르코 폴로의 출신을 두고 이탈리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의 분쟁이 언론에 보도된 적도 있다.

오래전 베네치아(베니스)를 찾았다. 공항에 도착하면 마르코 폴로 국제공항이라는 이름이 눈에 띈다. 마르코 폴로가 베네치아인임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탈리아의 수상 도시인 베네치아는 마르코 폴로 시대에는 베네치아공화국으로 베네치아 북부와 크로아티아의 달마티아 지역을 아우르는 강력한 해양국가였다. 1797년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1000여 년간 도시 국가로 번성했다.

5세기경 훈족의 침입으로 다뉴브강 연안에 살던 동고트족과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반도로 차례로 침입해 오면서 베네치아 근처에 살던 과거 서로마주민이 아드리아해로 쫓겨나게 됐다. 아드리아해 북부는 포강에 의해 석호(潟湖, lagoon)가 형성돼 있었다. 주민들은 석호의 섬과 습지 그리고 얕은 바다 위에 집을 짓고 저항했다.

이탈리아 베니스

7세기경 석호의 주민들은 스스로 지도자(Doge)를 선출, 비잔티움(동로마) 황제의 승인을 받아 베네치아공화국을 세웠다. 그리고 이탈리아반도의 게르만국가와 비잔티움제국 사이에 중계무역을 통해 부(富)를 축적하고 세력을 넓혀갔다. 척박한 석호를 중심으로 건국한 베네치아공화국은 역사의 빈곤이 콤플렉스였다. 역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뛰어난 항해술을 이용한 문화약탈이었다.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대성당은 9세기 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한 성 마르코의 성물을 훔쳐 와서 세운 성당이라고 한다.

13세기 초 성지 예루살렘이 이슬람세력의 위협에 놓이자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이 제4차 십자군 조직을 요청했으나 유럽의 기독교 국가가 재정적 어려움으로 선뜻 군대를 차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무렵 비잔티움제국 황실의 권력 쟁탈을 핑계로 경제적 이득에 관심을 가진 베네치아공화국은 십자군에 개입, 선박을 지원하여 비잔티움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공격, 많은 문화재와 보물을 약탈했다. 1204년 라틴계 십자군 국가는 콘스탄티노플에 라틴제국을 세운다. 콘스탄티노플에는 베네치아공화국 무역상의 집단거주지(베네치아 쿼터)가 만들어지고 치외법권적 특권이 주어졌다. 1261년 비잔티움제국은 십자군을 추방하고 콘스탄티노플을 되찾았으나 과거의 영광은 사라지고 200년 후 1453년 오스만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됐다.

마르코의 아버지 니콜로는 라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의 베네치아 쿼터에서 무역상을 하고 있었다. 1259년 니콜로는 주변의 분위기가 좋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라틴제국 건국 50년이 지나 부패가 만연되고 옛 비잔티움제국의 민중에 의한 방화와 약탈이 자행되고 있었다. 니콜로는 동생 마페오와 함께 재산을 정리하여 흑해를 건너 크림반도로 떠났다. 라틴제국은 니콜로 형제가 떠난 지 2년 후 몰락했다.

니콜로 형제가 크림반도에 도착했을 때 그 일대는 몽골제국의 일부인 킵챠크 칸국이 세워져 있었다. 그들은 볼가강 하류의 수도 사라이에서 1년간 체류했다가 다시 부하라에서 3년간 지냈다. 1264년 니콜로 형제는 일 칸국에서 몽골제국으로 가는 사절단의 권유로 쿠빌라이 칸을 만나기 위해 그들과 합류했다.

1162년 몽골고원에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정복 군주로 알려진 칭기스 칸이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테무진으로 그의 아버지가 이웃 부족의 신부를 약탈, 결혼해 낳은 아들이었다. 그가 어릴 때 아버지가 독살되고 친척들의 배신으로 어머니와 함께 많은 시련을 겪었다. 더욱이 결혼 후 신혼의 아내가 약탈당하고 우여곡절 끝에 되찾아 왔지만 이미 임신 상태였고 그때 태어난 장남이 ‘주치’였다. 그 후 ‘차카타이’ ‘오고타이’ ‘툴루이’ 등 아들을 더 두었다.

1206년 테무진은 몽골 부족을 통일해 ‘위대한 왕’이라는 의미의 칭기스 칸이 됐다. 그는 아들들과 함께 중앙아시아를 석권하고 멀리 카스피해 및 흑해까지 서방 원정을 도모했다. 칭기스 칸은 정복사업이 정리되자 아들들에게 제국을 나누어 주었다. 혈통문제로 시비가 있는 장남 주치에게는 흑해와 카스피해 북부의 킵챠크 칸국, 차남 차카타이와 3남 오고타이에게는 중앙아시아의 영토를 분봉했다. 칭기스 칸은 형제간 갈등이 깊은 장남과 차남을 제치고 3남 오고타이에게 몽골제국의 대칸(大汗, 황제)지위를 물려준 후 66세에 세상을 떠난다.

대칸 오고타이가 중병을 앓자 형제 중 누군가가 희생해야 한다는 무당의 말을 듣고 툴루이가 형을 위해 독배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오고타이는 툴루이 집안에 큰 빚을 지게 되었다. 오고타이 사후 그의 장남 귀위크가 대칸이 됐으나 재위 2년 만에 죽자 다음 대칸은 툴루이의 네 아들(몽케, 쿠빌라이, 훌라구, 아리크 부케) 중 장남 몽케가 계승한다. 대칸 몽케가 쿠빌라이와 함께 남송 정벌 도중 전사하자 수도 카라코룸을 지키고 있던 막내 아리크 부케가 차카타이 및 오고타이 칸국과 몽케 부하들의 지지를 받아 대칸으로 즉위했다. 남송 정벌 시 동부전선을 담당하고 있던 쿠빌라이는 이에 반발 자신의 거점 상도(上都)에서 스스로 대칸이 됐다. 1264년 형제의 대칸 계승 전쟁에서 승리한 쿠빌라이가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를 수도로 대원(大元)을 건국했다.

쿠빌라이는 동생 아리크 부케보다 정당성은 떨어지지만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인종 및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었다. 고려에 대해서는 원종의 아들(충렬왕)을 자신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시켜 부마로 맞이하고 고려의 국체와 풍속의 보전(不改土風)을 약속했다. 그는 조부와 숙부들의 서방 원정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유럽인을 제대로 만난 적이 없어 1266년 대도에 도착한 니콜로 형제를 우대하고 유럽의 정치제도와 문화를 배우고 싶어 했다.

기독교에 관심이 많은 쿠빌라이는 그들을 대칸의 특사 신분으로 격상시켜 인문학과 선진기술에 정통한 100인의 수도승 파송을 요구하는 교황 앞 친서와 함께 예루살렘 성묘교회의 성유(聖油)를 구해서 다시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니콜로 형제는 3년의 여행 끝에 베네치아에 돌아왔다. 떠날 때 보지 못한 니콜로의 아들 마르코가 성장하여 17세의 청년이 돼 있었다. 니콜로는 쿠빌라이의 친서를 전달했으나 교황이 궐위 상태이고 차기 교황이 결정되지 아니하여 답서를 받을 수 없었다. 니콜로 형제는 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 성유라도 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떠났다. 이번에는 아들 마르코가 동행했다.

니콜로 형제와 마르코 3인은 예루살렘에서 성유를 구하고 신임 교황으로부터 쿠빌라이 에게 전하는 친서를 받았다. 그들은 일 칸국 호르무즈로 향했다.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는 차카타이 및 오고타이 칸국과 쿠빌라이의 원나라와 관계가 좋지 않아 내륙 초원의 길은 위험하지만 페르시아 지방을 지배하고 있는 일 칸국은 쿠빌라이 친동생 훌라구가 세운 나라로 호르무즈와 중국 취안저우(泉州) 사이 바닷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호르무즈에 도착했으나 배편을 구하지 못했다. 부득이 육로를 선택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파미르고원 그리고 고비 사막을 지나 3년 반의 여정 후 1274년 쿠빌라이의 여름 수도 상도에 도착했다. 니콜로 일행은 성유와 함께 교황의 친서를 전달했다. 쿠빌라이는 크게 환영하고 당시 지상낙원이라고 알려진 상도에서 생활하도록 했다. <동방견문록>의 기록으로 서방에서 재너두(Xanadu)로 알려진 상도는 서양의 도원향으로 누구나 한번은 가보고 싶은 유토피아 같은 곳이었다. 궁전은 황금으로 지어졌고 거리의 나무는 은으로 치장돼 있었다고 한다.

쿠빌라이가 관심을 보인 사람은 21세의 청년 마르코였다. 언어에 재능이 있는 마르코는 긴 여정에 몽골어를 익혀 쿠빌라이와 직접 대화가 가능했다. 쿠빌라이는 마르코를 통해 서방의 사정을 알게 됐고 젊지만 그의 예리한 통찰력과 유려한 말솜씨에 매료됐다. 쿠빌라이는 그를 통해 광활한 중국 땅에서 신생국 원나라가 제대로 기능을 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특히 쿠빌라이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지방 호족들의 상황을 염탐하는 황제의 첩자로도 활용됐다. 마르코는 쿠빌라이가 주는 특별 파이즈(牌子, 통행증)를 가지고 중국 대륙은 물론 바닷길을 이용 참파(베트남) 및 버마까지 다녀왔다. 국제도시 양저우의 지방관으로 3년 근무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어언 17년 체류한 몽골제국을 떠나 마르코 일행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쿠빌라이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원나라에 오래 머무는 것이 불안했다. 과거 니콜로 형제가 콘스탄티노플의 베네치아 쿼터에서 라틴제국의 쇠락을 감지하고 사업을 정리해 크림반도로 이주했던 것처럼 몽골 관리들의 부패가 만연되고 있음을 목격하면서 원의 쇠락을 예감했다. 특히 그들을 환대한 쿠빌라이가 죽으면 정적에 보복되어 영원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일 칸국의 아르군 칸(훌라구의 손자)이 왕비가 죽자 쿠빌라이의 주선으로 같은 부족의 여인 코카친을 계비로 맞이하게 됐다. 새 왕비는 호송단과 함께 지금의 신장 위그루와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일 칸국을 가고자 했으나 그쪽을 지배하고 있는 오코타이 칸국의 카이두가 쿠빌라이에 대해 적대적이라서 육로를 포기하고 바닷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두에게는 아름다우면서 무예가 뛰어난 딸이 있었다. 그녀는 몽골 씨름을 잘해 자신을 이길 수 있는 남자가 있다면 결혼하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여장부였다. 그녀의 이야기가 <동방견문록>에 소개되어 후에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소재가 됐다고 한다.

코카친과 그녀의 호송단은 취안저우에서 14척의 장크선으로 남중국해와 인도양을 건너 일 칸국의 호르무즈를 향하게 됐다. 쿠빌라이는 항해경험이 많은 마르코 일행을 동행케 하여 코카친을 무사히 일 칸국에 도착시키고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했다. 1291년 마르코 폴로가 취안저우를 떠난 지 3년 후 그를 총애했던 쿠빌라이도 세상을 떠났다. 장크선은 싱가포르 및 인도 동남해를 지나면서 1293년 2월 호르무즈에 도착했다. 2년간의 항해로 대부분 선원을 잃었으나 코카친과 마르코 일행은 살아남았다. 그사이 계비를 맞이해야 할 아르군 칸이 죽어 몽골 관습에 의해 그의 아들 카잔 칸이 부인으로 맞이했다.

마르코 일행은 일 칸국을 종단, 흑해 연안으로 도착해 다시 뱃길로 1295년 베네치아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들은 동방에서 가져온 보석과 쿠빌라이의 선물 등으로 베네치아 중심지에 거대한 주택을 구입하는 등 큰 부자가 됐다.

이탈리아반도의 두 겨드랑이에 2개의 도시 국가가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동쪽 아드리아해의 베네치아공화국과 서쪽 리구리아해의 제노바 공화국은 비잔티움제국과의 무역 상권을 가지고 다투고 있었다. 1299년 제노바는 달마티아 해안의 섬을 무역 거점으로 확보하기 위해 함대를 아드리아해에 보내 베네치아공화국을 위협했다. 마르코는 사재를 기부해 전비에 충당케 하고 스스로 전투함의 함장이 되어 제노바와 싸웠으나 패배,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히게 됐다.

마르코는 제노바 감옥에서 감방 동료로 피사 출신의 작가 루스티켈로를 만나 자신의 동방여행을 즐겨 이야기했다. 루스티켈로는 마르코의 구술을 기록하고 자신이 수집한 동방에 대한 이야기를 넣어 <백만(Il Milione)>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사람이 읽게 됐다. 오스만제국이 비잔티움제국을 멸망시켜, 지중해와 육로를 통한 동방무역이 단절되자 이베리아반도를 통한 대서양 횡단 동방무역이 시도되고 있었다. 콜롬버스 및 마젤란 등 젊은 모험가들은 이 책을 읽고 ‘재너두’가 있는 황금의 나라 동방에 가는 꿈을 키웠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마르코 폴로 여행기를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생각하고 마르코 폴로를 “백만 가지 거짓말쟁이”라고 폄훼하면서 ‘허풍쟁이’ ‘밀리오네 선생’이라는 별명도 붙였다. 1324년 그가 임종에 이르자 지인들이 몰려와 죽기 전에 신부님께 거짓말을 고해하고 떠나라고 권했다. 마르코 폴로는 “그 책에 나와 있는 이야기는 자신이 겪은 내용의 절반도 안 된다”고 일축했다고 한다.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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