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미희의 음악여행 ㊸] 넓은 벌 동쪽 끝으로, 고 박인수 교수님을 추모하며
[홍미희의 음악여행 ㊸] 넓은 벌 동쪽 끝으로, 고 박인수 교수님을 추모하며
  • 홍미희 기자
  • 승인 2023.03.27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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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8일 소천하신 박인수 교수님의 장례 예배가 3월 2일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3월 25일 서울대 음대 성악과 동문회, 한세대 예술학부 성악과 동문회, 박인수 소리연구회 등은 여의도 순복음교회 예루살렘 성전에서 추모예배를 열었다. 예배는 음악회와 같았다는 것이 참석한 사람들의 전언이다. 부르시던 성가곡과 향수에 이르기까지 고인의 노래가 들렸고 많은 제자들이 연주하는 음악이 추도예배 내내 흘러넘쳤다. 친구, 후배, 제자가 추모사를 하며 박인수 교수님을 아쉬움 속에서 보내 드렸다. 괜히 눈물이 났다고 했다.

평소에 친분이 두텁지 않아도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아주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는 사이가 있다. 내게는 박인수 교수님이 그렇다. 하루 날 잡아 찾아뵙고 말씀을 듣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사람은 언제나 곁을 떠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잠시 잊었다. 박인수 교수님은 댄디, 젠틀 이런 단어가 어울리는 분이셨다. 키도 크고 외모도 멋지고 교양이 몸에 배어 있는 느낌이었다.

지난 3월 25일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열린 박인수 교수 추모예배

박인수 교수님 하면 떠오르는 곡은 단연코 ‘향수’다. 가수 이동원과 함께 부른 이 곡은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이 곡으로 인해 대중가수와 함께 듀엣 곡을 불렀다는 이유로 시끄러워지자 박인수 교수님은 국립오페라단에서 스스로 사퇴했다. 한 지인이 워낙 베스트 셀러였던 이 곡으로 얼마나 벌었느냐고 묻자 연어 한 박스 받았다며 웃었다. 이동원 씨가 빚이 많아서 돈을 줄 게 없다면서 생선 한 박스를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뜯어보니 연어였다고. 돈과 계산 이런 것과는 거리가 있는 분이었다.평생을 집에 월급을 가져다준 적이 없다는 교수님은 제자가 많았다. 제자들에게 밥도 사고 레슨도 그냥 해주시고 이렇게 정성을 쏟아서인지 아직까지도 제자들이 교수님의 연주회나 모임에 늘 곁에 있었다. 일반적으로 현직에서 물러나면 잊혀진 존재가 되기 쉽지만 박인수 교수님은 달랐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백석대학교 석좌교수로 가셨을 때였는데 대학원 수업이었던 것 같다. 우연히 방에서 하는 수업에 앉아 있게 된 적이 있다. 친구 때문에 갔는데 교수님께서 그냥 있어도 된다고 해서 같이 듣게 된 수업이었다. 그런데 당시 유행하던 어느 팝가수의 노래를 들려주면서 이렇게 부르는 게 진짜 노래를 잘하는 거라고 말씀하시는 거였다. 그러면서 “말하는 거랑 똑같잖아. 이런 게 좋은 거야”라고 한 마디 덧붙이셨다. 이미 오래전 향수를 부르신 전적으로 생각이 트여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의 발성을 잘하는 노래라고 말씀하시다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요즘에야 공기 반 소리 반 이런 말과 함께 말하듯이 불러라 등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당시만 해도 성악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발성법도 교수마다 다르고 원칙도 많았다. 얼굴 뼈를 올리고, 내리고 숨은 어떻게 쉬고 등등 고집도 원칙도 많았는데 박인수 교수님은 달랐다.

박인수 교수님은 또 미식가로도 유명했다. 맛없는 걸로 한 끼를 때우면 “분하다”고 말씀하셨다. 교수님은 비싸고 맛있는 집은 맛집이 아니라고 했다. 비싸면 당연히 맛있어야 하는 거고 비싸지 않지만 맛있는 집이 진정한 맛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맛집은 아주 마음에 드는 지인이 아니면 공개하지 않았다. 그가 선정한 맛집에는 집마다 다 이유가 있었다. 어느 집은 깔끔하고 정갈해서 좋고 어느 집은 거미줄이 쳐 있어도 이 메뉴에는 그것이 멋이라는 집도 있었다. 그날 수업이 끝나고 가게 된 맛집은 용산에 있는 오래된 음식점이었다. 맛은 잘 알 수 없었지만 교수님이 맛있는 집이라 하니 이미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맛집처럼 느껴졌었다.

박인수 교수님은 2004년 백석대학교에 석좌교수로 부임했다. 서울대학교를 정년퇴임하면서 옮기게 된 학교였다. 당시 총장이셨던 김기만 총장님은 교수님이 부임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날 조선일보 기사를 봤는데 서울대학교 정년퇴임 교수 명단이 10여 명 나왔어요. 그때가 여름방학이었으니 8월 말쯤이었는데 그중 박인수라는 이름이 있어서 만나고 싶다고 연락드렸죠.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어요. 그리고 총장실에 오신 교수님께 석좌교수로 모시고 싶다고 했더니 첫마디가 ‘아~감사합니다’ 그러면서 본인이 KBS 한 시간짜리 대담 프로그램 나가는데 백석대 교수라고 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시는 거예요. 그런데 막상 프로그램에 나가서 말씀하실 때 백석대 교수라는 게 어색하신 것 같았어요. 워낙 오랫동안 서울대에 계셨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가수 이동원(오른쪽)과 성악가 박인수가 1989년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향수’를 열창하고 있다.[유튜브 캡쳐]

이후 세월이 흘러 김기만 총장님이 퇴임을 하시자 박 교수님도 같이 퇴임하셨다. “의리였을까요? 질문하자 “저 없으면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재미라는 말에 담긴 여러 의미가 다가왔다. “박 교수님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 같은 경우에는 허물없이 그냥 막 대해서인지 저를 그렇게 좋아했던 것 같아요. 어느 날 명절 때는 갑자기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어디시냐고 물었더니 ‘집 문 앞에 있습니다.’ 그러시는 거예요. 깜짝 놀라서 나갔더니 가방을 들고 서 계셨어요.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명절 때 갈 곳도 없고 찻집에 가서 책이나 읽으려고 나왔다고 말씀하셨어요. 평소에 책을 그렇게 좋아하셨어요.”

3년 전쯤 이수인 선생님 댁을 찾았던 기억이 있다. 선생님 댁에서 열린 음악회를 듣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썼던 적이 있는데 그게 선생님의 마지막 글이 되었다. 박인수 교수님은 얼마 전 TV조선에서 방영했던 마이웨이가 고별 프로그램이 된 것 같다. 김기만 총장님은 아쉬워하시면서 “교수님이랑 마지막 통화가 그거예요. 미국에서 오실 때가 되었는데 안 오셔서 전화 드렸죠. 한국에 안 나오셨어요? 그랬더니 ‘나왔으면 제가 총장님께 전화를 안 했겠어요? 전화 드렸죠.’ 그렇게 말씀하신 게 마지막 통화였어요.”

이제 넓은 벌 동쪽 끝으로 박인수 교수님은 가셨다. 죽음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아인슈타인은 “더는 모차르트를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박인수 교수님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의 젊은 시절의 소리는 우리 곁에 맑고 강하게 남아 있다.

1990년 12월 젊음의 행진에서 박인수 테너가 열창을 하고 있다.[KBS 영상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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